책과 삶

수원·울산·안산·파주… ‘노동 도시’의 신산한 노동 풍경들

김지환 기자

▲ 노동여지도…박점규 지음 | 알마 | 390쪽 | 1만6800원

[책과 삶]수원·울산·안산·파주… ‘노동 도시’의 신산한 노동 풍경들

125번째 노동절을 맞아 신산한 한국 사회 노동의 풍경을 담아낸 지도가 나왔다. ‘지도 제작자’는 20여년을 현장에서 노동자와 함께해온 노동운동가 박점규씨다. 그는 지난해 3월 ‘삼성의 도시’ 수원에서 시작해 지난 4월 ‘책의 도시’ 파주까지, 1년2개월 동안 전국 28개 지역을 발로 뛰어 <노동여지도>를 그려냈다. 150여년 전 고산자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그려내듯 발품과 땀의 결정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노동지도는 크게 달라졌다. 정리해고제, 파견법이 만들어지면서 불안정 노동은 아예 일상이 됐다. <노동여지도>에도 노동이 ‘유연화’된 15년의 흔적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어디를 가도 삼성과 현대차, 대기업이 장악하지 않은 도시가 없었다. 재벌들이 만들어놓은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를 빼놓으면 쓸 이야기가 없었다.”

처음으로 찾은 도시 수원에서 저자는 노동자의 권리를 다시금 물었다. 2007년 세상을 떠난 삼성반도체 백혈병 노동자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와 2013년 ‘너무 힘들었다’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삼성전자서비스 협력업체 수리기사 최종범씨 이야기가 포개졌다. 최씨는 채 돌이 되지 않은, ‘별’이라는 이름의 딸을 둔 아버지였다. “삼성전자에서 아빠는 딸을 잃었고, 삼성전자서비스에서 딸은 아빠를 잃었다.”

흑백필름 시절 모두 같이 ‘공돌이’였던 울산의 노동자는 이제 중대형 아파트에 살며 그랜저를 모는 ‘직영계급’, 소형 임대주택에서 아반떼를 타는 ‘하청계급’, 이 공장 저 공장을 떠돌아다니는 ‘알바계급’으로 나뉘었다. 20대 청춘이지만 하청계급이라는 꼬리표를 단 노동자는 소개팅에 나가는 것도 꺼린다. 맞선 자리에서 “직영이세요?”라는 질문을 받는 게 싫어서다.

안산은 세월호를 빼닮은 노동재난구역으로 묘사된다. 대한민국 파견노동 1번지, 인간경매 단지로 불리는 시화공단 입구엔 ‘생산직 인력파견, 자동차부품 전자, ○○인력’이라는 광고판이 지천에 깔렸다. 창원은 ‘직영 아빠와 하청 아들의 도시’다. 그릇된 부정(父情)은 사내하청을 정규직화하고 신규채용을 늘리는 정공법 대신 자식에게 일자리를 물려주는 ‘고용 세습’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노동여지도>에 씁쓸한 우리의 자화상만 담겨 있는 건 아니다. “작은 골목을 뒤져 노동의 희망을 찾았고, 정직한 땀의 대가를 찾는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싹트고 있는 희망 덕분에 <노동여지도>는 ‘재벌여지도’에 머물지 않을 수 있었다. 부도난 회사를 인수해 노동자 자주관리회사로 전환하고 흑자로 돌아선 청주의 시내버스회사, 노조와 병원장이 함께 일궈낸 행복한 파주의 공공병원, 성과급을 받는 대신 후배들을 정규직으로 만든 군산 타타대우상용차의 선배 노동자가 희망의 증거다. 송경동 시인은 추천사에서 “‘저항’이라는, ‘희망’이라는 항체가 어느 지역에서, 어떤 이들에 의해 구체적으로 생성되고 있는지도 상세히 기록돼 있다”고 평했다.

현재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으로 일하고 있는 저자는 에필로그를 ‘장그래’에게 부치는 편지로 갈음했다. “2015년, 오늘 그린 이 땅의 노동여지도는 전국이 흐리고 비가 내립니다. 장그래와 함께 그려갈 10년 뒤의 노동여지도는 ‘비온 뒤 맑음’으로 기록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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