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더미에 깔려도 솟아날 구멍 있다읽음

박송이 기자

희망살림 프로젝트, 서민이 못 갚은 은행부실채권 대부업체로부터 기부받아 빚 탕감

어느 날 갑자기 1600만원의 빚이 생겼다. 알지도 듣지도 못한 빚이었다. 알고보니 15년 전 남편이 자신의 명의로 자동차 담보 대출을 받아 생긴 빚이었다. 당시 450만원이었던 원금은 연체이자가 붙어 1600만원으로 늘어나 있었다. 이선영씨(가명·44)는 3년 전 남편과 이혼했다. 남편의 가정폭력 때문이었다. 상습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던 남편은 이혼을 해주지 않았다. 이씨는 독한 마음을 먹고 남편의 마지막 폭력에는 합의를 해주지 않았다. 구치소에 들어간 남편은 그제야 이혼에 합의해줬다. 그런 남편에게 ‘왜 내 이름으로 빚이 있느냐, 당신이 해결하라’고 해봤자, 오히려 상황만 더 나빠질 것 같았다. 빚은 이씨가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몫이 됐다. 그러나 이혼 후 가사도우미 일을 하며 두 아이를 홀로 키우는 이씨에게 1600만원이라는 돈은 도저히 갚을 엄두가 나지 않는 액수였다.

희망살림에서 대부업체에서 양도받은 장기연체 채무자들의 채권 26억원가량을 소각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희망살림에서 대부업체에서 양도받은 장기연체 채무자들의 채권 26억원가량을 소각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대부업체로 넘어간 땡처리 채권 대상

이씨에게 독촉전화를 한 곳은 대부업체였다. 그런데 남편이 돈을 빌린 곳은 캐피탈 회사였다. 어떻게 된 일일까. 캐피탈 회사에서 대부업체에 채권을 넘겼기 때문이다. 3개월 이상 연체된 채권은 부실채권이다. 금융감독기관은 부실채권 보유 비율로 금융사의 건전성을 평가한다. 건전성이 악화되면 제재가 들어간다. 이러한 제재를 피하기 위해 금융사들은 부실채권의 추심이 어렵다고 판단될 경우 헐값으로 채권시장에 팔아버린다. 이를 대부업체가 사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씨의 빚은 최종 얼마에 팔렸을까? 부실채권 중에서도 장기부실채권은 헐값에 팔린다. 이씨를 상담했던 제윤경 희망살림 대표는 이씨의 채권이 최종적으로 2000원에 팔렸다고 말했다. 만약 대부업체가 이씨에게 1600만원을 고스란히 받아낸다면 대부업체는 1599만8000원의 수익을 올리는 것이 된다. 은행이 손해를 보는 것 아닐까? 제윤경 대표는 “은행은 손쉽게 손실을 털어버리고 이런 ‘리스크 프리미엄’은 은행 고객들에게 대출이자 등으로 고스란히 전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채무자들은 자신들의 빚이 이렇게 ‘땡처리’되고 있음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

희망살림이 착안한 것은 이 지점이다. 저소득층 및 빈곤층의 재무상담을 해주던 제윤경 대표가 상담을 하면서 늘 부딪혔던 부분은 바로 ‘빚’이었다. 빈곤에서 헤어나오기 위해서는 일자리를 찾고 노동현장으로 복귀하는 것이 급선무다. 그러나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는 채무자들은 소득이 포착되면 바로 압류를 당한다. 노동현장으로 복귀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채권이 땡처리돼 대부업체로 넘어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부업체와 협상해 채무조정을 할 여지가 생기는 셈이다. 이선영씨의 사례를 듣고 제 대표는 해당 대부업체와 협상했다. 이미 이씨의 통장을 압류해놨던 대부업체는 이씨에게 1000만원까지 깎아주겠다고 했다. 채권 ‘땡처리’ 현실을 알고 있는 제 대표는 업체에 이씨의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고 설득했다. 지자체 대부업 관리·감독 담당 공무원의 도움도 받았다. 대부업체와 100만원으로 합의를 했다. 그래도 대부업체로서는 99만8000원의 이득을 남긴 셈이다.

희망살림은 채권 소각 운동도 시행 중이다. 채권에는 소멸시효가 있다. 민법상 금융기관에서 빌린 돈의 마지막 상환일로부터 5년이 지나면 시효가 끝난다. 소멸시효가 지난 채권은 추심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다. 채권추심법 11조는 ‘무효이거나 존재하지 아니한 채권을 추심하는 의사를 표시하는 행위’를 금지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금융당국은 이 조항에 대해 추심을 금지하는 것은 물론 거래 또한 금지한다고 폭넓게 해석한다. 그러나 여전히 시장에서는 소멸시효가 끝난 부실채권이 암암리에 헐값에 거래되고 있고, 추심도 이뤄지고 있다.

2013년 5월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행복기금을 방문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2013년 5월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행복기금을 방문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도덕적 해이’ 문제 앞서 사회적 책임

채권시장에서 이러한 불법거래 및 불법추심이 이뤄지는 것을 알고 희망살림은 대부업체의 관리·감독 권한을 갖고 있는 지자체에 도움을 요청했다. 서울시, 도봉구, 은평구, 성남시 등이 여기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제 대표는 대부업체 관계자들을 만나 소멸시효가 지난 채권은 거래 및 추심이 금지됐다는 점을 들어 채권을 기부해달라고 요청했다. 회유도 하고 때로는 적발 가능성을 들어 협박도 했다. 처음에는 황당하게 생각하던 대부업체 사장들도 그들이 팔기 애매했던 장기연체 채권들을 모아 기부했다. 억 단위의 채권들이 뭉텅이로 쏟아졌다. 제 대표는 채권들을 모아 소각 행사를 열었다. 빚이 사라졌으니 노동시장으로 복귀할 수 있다는 신호를 주기 위해서다. 제 대표는 “소멸시효가 지나고 거래도 안 되는 채권을 기부받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도 하는데, 소멸시효가 지난 채권도 소송으로 쉽게 살릴 수 있다”면서 “그러지 못하도록 거래가 애매한 것들을 받아내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채권이 살아나는 순간 채무자의 경제활동도 중단된다. 압류가 들어오기 때문이다. 소각된 채권의 채무자들은 자신의 빚이 이제 없어졌음을 알고 있을까. 희망살림은 이 사실을 채무자의 주소지로 통보했지만, 대부분 인지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채무자들이 추심을 피해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그래도 빚이 사라졌음을 인지한 채무자들은 감사의 말을 전하며 다만 몇만원이더라도 희망살림에 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빚탕감에는 언제나 뒤따르는 문제가 있다. ‘도덕적 해이’다. 그러나 과연 빚이 채무자 개인만의 책임일까. <빚으로 지은 집>(아티프 미안, 아미르 수피 지음)은 미국의 가계부채 현상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책은 미국의 빚은 단순히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주택담보대출에서 주택가격 하락은 위험요인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부담은 온전히 채무자의 몫이다. 학자금대출 또한 마찬가지다. 학자금대출을 받은 대학생이 취업에 실패하면 그 책임 또한 학생이 져야 한다. 정부의 주택정책의 실패, 취업난, 불황 모두 개인이 떠맡아야 할 위험이다. 금융권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이 책은 채무자만이 위험부담을 온전히 지는 것을 ‘채무계약의 불평등’이라고 꼬집는다. 채무계약이 불공정한 만큼 채무의 재조정이 필요하다. 채무 재조정은 다양한 형태로 이뤄진다. 주택가격이 떨어졌을 때 은행이 이자액을 깎아주는 것도 채무 재조정이다. 희망살림의 빚탕감도 채무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지 않는 채무 재조정이다.

밖으로 내몰리는 장기연체자 복귀시켜야

나라에서 공인한 채무조정제도도 있다. 흔히 알고 있는 프리워크아웃, 개인워크아웃, 개인회생, 개인파산 및 면책 등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지난 대선에서 저소득층 채무자의 빚부담을 덜어주고 경제적 자활을 지원하는 채무 재조정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2013년 3월 문을 연 국민행복기금이 그 일환이다. 국민행복기금은 장기연체 채무자의 채무를 원금의 최대 50%까지 감면해주는 제도다.

그러나 공약대로 국민행복기금이 과연 채무 재조정을 잘 이행하고 있을까? 지난 국정감사에서는 국민행복기금이 채무 상환능력이 전혀 없는 계층의 현실을 외면하고 오히려 실적 올리는 데만 급급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민병두 새정치연합 의원은 국민행복기금 약정 체결자 중 채무 상환능력이 없는 사람이 9만5000명에 이른다고 지적했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60세 이상 고령자, 장기 입원자, 장애인 부양자, 북한이탈주민 등은 보통 채무 상환능력이 없다고 분류된다. 그러나 국민행복기금은 이들과 상환 약정 체결을 맺었다. 그 배경에는 실적주의 운영이 있다. 국민행복기금을 운영하는 한국자산관리공사가 실적을 쌓기 위해 금융권의 부실채권을 일괄 매입하고 신용정보회사에 채권 추심을 위탁해 그 취지와 거리가 먼 약탈적 채권 추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아가 한국자산관리공사는 채권 소멸시효 연장을 막기 위해 극빈층을 대상으로 ‘묻지마 소송’까지 벌이고 있었다.

애초에 국민행복기금의 구성과 운영원리 자체는 공공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국민행복기금은 주식회사다. 정부의 공적자금 없이 금융권의 출자로 만들어졌다. 운영원리도 철저히 이윤추구적이다. 한국자산관리공사는 12개 신용정보회사에 채권 추심을 위탁하고 있는데, 이 신용정보회사들은 약 20%의 성과연동 수수료를 받는다. 신용정보회사들로서는 채무자의 상환능력과 상관없이 더 많은 빚을 상환받는 것이 우선일 수밖에 없다. 제윤경 대표는 “국민행복기금이 은행들로부터 채권을 3% 가격에서 산다. 여기서 채무자에게 50%를 깎아주면 47%가 남는 장사인 셈이다”라며 “부실채권시장에서 또 한 차례 이윤을 남기겠다는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가계부채는 1100조원이 넘었고, 이 수치에 포함되지 않은 부실채권까지 더하면 그 규모는 더 커진다. 정부가 저소득층 채무조정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을 방기하고 있는 사이, 350만명의 장기연체 채무자들은 사회 밖으로 내몰렸다. 희망살림은 비영리단체 최초로 대부업체로 등록할 계획이다. 대부업체들을 설득해 소멸시효가 지났거나 거래가 애매한 채권을 기부받는 것을 넘어 직접 채권시장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돈을 내고 부실채권을 매입해 100% 탕감부터 일부 상환까지, 채무자들의 형편에 따라 채무조정을 할 생각이다. 저소득층 채무자들이 추노꾼에게 쫓기듯이 빚에 쫓겨 도망다니는 게 사회에 이득이 되지는 않는다. 빚을 탕감받아 노동시장에 복귀해 건전한 소비자와 납세자로 돌아오는 것이 더 큰 이득일 것이다. 제 대표는 “빚을 못 갚을 환경에 처한 사람들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이들을 구제하지 못했던 사회에서 구제하는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만들려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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