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끼리? 이민족끼리?

경향신문은 “반민족적이며, 반통일적인 보수 언론”이 아니다. 적어도 내 판단으로는 그 반대에 더 가깝다. 그런데 얼마전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은 경향신문을 다른 신문과 함께 그렇게 규정했다. 그 이유는 경향신문이 “6·15발표 5돌 기념 민족통일대축전 성과를 악랄하게 헐뜯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온 겨레의 이름으로 준열히 단죄·규탄”당하고 말았다. 북측을 이렇게 화나게 한 것이 뭔가 했더니 ‘우리민족끼리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는 제목의 사설이었다. 그러나 이 사설은 6·15 선언의 토대인 ‘우리민족끼리의 정신’을 헐뜯었다기보다 옹호한 것이다. 다만, 지난 5년간 한반도 문제를 우리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현실에 대해 남과 북의 책임, 특히 북의 책임을 따졌을 뿐이다.

- 北조평통 경향 사설 비난 -

북한은 ‘미국 추종의 원죄’를 안고 있는 남한에 대해 ‘우리민족끼리 정신’을 내세우면 언제나 우월한 지위에 설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근거가 없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서울 답방을 약속했지만, 김대중정부 때 지키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출범 즈음에도 노대통령은 북측에 정상회담을 타진했지만, ‘예의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거절’을 당했다. 1년전 북핵문제를 다루는 6자회담에 진전이 없자 북한은 남북회담을 끊었고, 최근 6자회담 재개 분위기가 조성되자 남북회담을 재개했다. 남북회담은 여전히 북·미관계에 종속되어 있다. 북한은 북핵문제의 장에서도 남한을 배제했다. 북한은 우리민족끼리 정신을 온전히 실천하지 않았다.

북한이 기분 나빴던 것은 바로 이 사실을 지적당했기 때문이다. 북한은 ‘우리민족끼리’가 일방적으로 남한에 짐을 지우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남북은 민족공조, 남북협력에 관해 각각 절반의 책임을 공유하고 있다.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는 것이 6·15 선언 1항이다. 이 선언에 충실하자면, 북한은 남한을 한반도문제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긴밀히 협력해서 군사적 긴장도 완화하고, 북핵문제도 풀어나가야 했다. 그러나 북한은 남한을 ‘주인’ 대접하지 않았다. 주인은 미국이었고, 한국은 객이었다. 미국은 큰 소리쳤고, 한국은 눈치를 봐야 했다.

노대통령이 북한에 대해 얼굴을 붉힐 것은 붉혀야 한다고 했지만, 실제 그렇게 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신뢰가 없는 남북관계에서 그런 태도는 상황만 나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북한에 대해선 할 말도 못하고, 말도 먹혀들지 않는 남한이다. 그런 한국이 미국 앞에서 할 말을 할 수가 없다. 한국은 미국의 선의를 기대하며 미국의 행동반경 안에 갇혀 있어야 했다. 북한이 남한의 손발을 묶은 것이다. 그러는 사이 북한은 미국만을 상대로 위험한 게임을 하고, 그럴수록 남한은 미국에 매달려야 하는 ‘이민족끼리’의 상황, 이것이 한반도의 현실이었다. 이게 주객전도(主客顚倒)가 아니면 뭔가.

- 남북 협력해야 美종속 극복 -

다행히 김정일 위원장이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만나 6자회담 참가 용의를 표명하고 남북대화를 복원하면서 전기가 찾아왔다. 남북대화가 이제 시작인데 벌써 한국의 자세가 달라졌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당당하게 미국에 대고 ‘대북발언 조심’ 경고를 한 것이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이 어땠는가. 얌전하게 유념하겠다고 했다. “우리민족끼리 정신에 따라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도모”한다는 남북장관급회담 합의를 주목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남과 북이 합심하면 미국에 매달릴 일이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민족끼리의 힘’이다. 한국은 6자회담 재개 때 ‘중요한 제안’을 한다고 예고했다. 이 안은 필연코 미국의 양보를 전제로 한다. 북한이 남한을 밀어줄 때가 바로 이 때이다. 남한의 제안을 놓고 남북이 진지하게 토론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에 주도적 역할을 맡겨줘야 한다. ‘우리민족끼리는’ 누가 누구에게 쓸 카드가 아니다. 그것으로 해답이다. 얼마나 실천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이대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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