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삼성 비판 ‘김상봉 칼럼’ 미게재 전말

강진구 기자

‘광고주 의식한 누락’ 내부서 거센 비판

기자총회 “독립언론 가치 중대 훼손” 치열한 토론

국장단 “경영사정 고려한 판단… 정론원칙 지킬 것”

경향신문이 최근 외부 고정필진이 보내온 삼성 비판 칼럼을 게재하지 않아 내부 기자들이 반발하는 등 진통을 겪었다. 이번 사태는 신문의 비판논조를 이유로 경향과 한겨레에 대한 광고집행을 2년 이상 중단해온 삼성그룹이 광고를 정상화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가운데 발생했다. 국내 언론이 편집 제작과정에서 광고주를 의식한다는 점은 공공연한 비밀처럼 돼 있으나 공개적으로 문제가 불거지는 것은 드문 일이다.

김상봉 교수의 칼럼 ‘삼성을 생각한다’가 실리지 못한 사실이 알려진 지난 17일부터 1주일간 경향신문 편집국과 사장실 등 주요 장소에 내부 자성을 촉구하는 신입기자(47기)들의 성명서가 붙었다. | 김기남 기자

김상봉 교수의 칼럼 ‘삼성을 생각한다’가 실리지 못한 사실이 알려진 지난 17일부터 1주일간 경향신문 편집국과 사장실 등 주요 장소에 내부 자성을 촉구하는 신입기자(47기)들의 성명서가 붙었다. | 김기남 기자

◇ 칼럼 미게재 경위=경향신문 고정필진인 전남대 김상봉 교수는 지난 16일 삼성의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의 책 <삼성을 생각한다>를 소재로 한 칼럼 원고를 e메일로 보내왔다. 이건희 전 회장의 ‘황제식 경영’ 스타일과 삼성의 자본력 앞에 움츠러든 국내 언론의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칼럼 내용을 검토한 박노승 편집국장은 김 교수와 전화통화를 하고 신문사의 어려운 경영현실을 설명하면서 “하루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김 교수는 “내일 아침 신문에 나의 글이 실리지 않으면 인터넷 언론에 기고하겠다”며 거절했다. 경향신문은 김 교수의 글을 싣지 않고 다른 칼럼으로 대체했다.

◇ 인터넷 언론 게재=김 교수는 예고한 대로 다음날 칼럼 원문과 경향신문에 이 칼럼이 실리지 않은 경위를 적은 글을 ‘레디앙’ ‘프레시안’ 등 인터넷 언론에 공개했다. 그는 ‘경향신문을 비난하지 않겠습니다’라는 제목의 이 글을 통해 “이 땅의 진보언론들이 처해있는 어려움의 원인이 신문사 내부의 잘못이 아니라 언론 소비자들의 무지와 무관심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며 “이번 일을 두고 경향신문을 비난하기보다 진정한 독립언론의 길을 걷도록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번 일은 우리 사회 모순의 뿌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며 “우리 사회에서 삼성을 비판하는 것은 진보언론이라 불리는 신문에서조차 불가능한 일이 돼 버렸다”며 개탄했다. 김 교수의 글은 ‘미디어오늘’ ‘기자협회보’ 인터넷판 등에 잇따라 소개되면서 네티즌들의 댓글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 경향 내부의 문제제기=김 교수의 삼성 비판칼럼이 누락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2008년 입사한 편집국 공채 47기 기자들이 가장 먼저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은 김 교수의 글이 인터넷 매체에 실린 17일 오후 자체 토의를 거쳐 칼럼 누락에 항의하는 글을 회사 게시판에 올렸다. 이들은 “이번 사건은 경향신문이 이명박 정부는 비판할 수 있어도 삼성은 함부로 비판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 아닌가”라고 의문을 제기하며 삼성 관련 보도에 대한 편집국 차원의 단호한 원칙을 주문했다. 경향신문 기자단체인 한국기자협회 경향신문 지회는 그 다음날 편집국 기자총회를 열고 독립언론의 보도원칙과 관련해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 기자단체는 토론과정에서 나온 의견을 정리해 발표한 성명을 통해 이번 사태는 ‘독립언론의 가치에 대한 도전’이라고 규정하며 “우리는 광고로 언론을 길들이려는 부당한 시도와 자기 검열을 강요하는 내부 압력에 굴하지 않고 정론직필·불편부당이라는 사시를 지킬 것”이라고 다짐했다.

◇ 편집국 대응=기자총회에서 날선 비판의견을 접한 편집국 국장단은 수습방안 마련에 나섰다. 국장단은 “이번 사태에 대한 회사의 공식 입장이 무엇인지 공개적으로 밝혀달라”고 한 기자들의 요구를 수용, 지면을 통해 그간의 경위와 입장을 독자들에게 알린다는 방침을 세웠다. 박 편집국장은 “김 교수의 칼럼이 들어가면 회사가 한동안 더 어려워질 수 있다고 우려했으나 기자들의 문제인식에 대해서도 충분히 공감한다”며 “이번 일로 정론보도에 대한 우리의 원칙은 더욱 확고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 경향신문 어떤 회사=경향신문은 전·현직 사원이 주식의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사원주주회사다. 1946년 가톨릭에 의해 창간되었으나 정치환경에 따라 소유주가 여러차례 바뀐 끝에 98년 지금과 같은 독립언론 구조가 됐다. 이후 경향신문은 정치권력을 포함해 어느 곳이든 성역없이 보도한다는 원칙을 천명했다. 2007년 말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 비자금을 폭로한 사건을 집중 보도한 것을 계기로 삼성으로부터 2년 이상 광고를 받지 못했고, 이명박 정부 출범 후 정부 및 공공기관의 광고 수주액이 크게 떨어지면서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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