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안전발판' 4년째 감감무소식인 이유

조형국·김유진·이수민 기자

“지하철 승강장 안전발판 설치에 따라 승강장과 지하철 간격이 3㎝ 이내로 유지하게 돼 지하철 승·하차시 실족 사고가 획기적으로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2016년 4월20일 서울시는 2019년까지 발빠짐 사고 위험이 높은 서울 지하철 46곳 역 접이식 자동안전발판 1311개 설치 계획을 밝히며 “시민의 만족도 향상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발빠짐 사고는 급감했다. 성중기 국민의힘 서울시의원이 서울교통공사(공사)에서 제출받은 ‘최근 5년간 지하철 발빠짐 사고 발생 현황(연단실족, 휠체어 사고 포함)’ 자료를 보면 2018년 104건, 2019년 96건이던 발빠짐 사고는 지난해 46건으로 반토막 났다. 올해 6월까지는 14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31건)에 비해 절반 이상 줄었다.

자동안전발판의 효과는 아니다. 2021년 9월 현재 공사가 관할하는 1~9호선 역 중 자동안전발판이 설치된 곳은 3호선 경찰병원역, 9호선 한성백제역 두 곳(총 16개) 뿐이다.

발빠짐 사고 감소의 가장 큰 원인은 코로나19로 보인다. 공사가 파악한 올해 1~5월 평균 수송인원은 1억6354만4017명으로 2년 전 같은 기간(2억2597만6833명)에 비해 40% 가량 감소했다. 지하철 이용객이 줄면서 전체 발빠짐 사고 건수도 함께 줄었다.

1300여개 계획 중 현재 설치된 자동안전발판은 0개다(*3호선 경찰병원역, 9호선 한성백제역은 계획 외 사업). ‘획기적 사고 감소’를 공언했던 서울시 계획은 왜 흐지부지 됐을까. 서울시의회 회의록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두 바퀴엔 절벽 같은]'자동안전발판' 4년째 감감무소식인 이유

공사는 2015년 직원 아이디어로 특허를 받은 접이식 자동안전발판을 확대 설치하는 계획을 세웠다. 2016년 9월 195개, 2017년 말 215개, 2018년 말 300개 등 2019년 말까지 총 1311개 설치하겠다고 했다.

이 계획은 감사원 감사로 제동이 걸렸다. ‘안전발판의 안전성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감사원. 2016년 5월 국민안전 위협요소 대응·관리실태 실지감사). 개별 발판의 안전조건은 인증을 받았지만, 전자제어부 등 종합적인 제어 시스템의 안전성 인증을 미룬 게 화근이었다. 공사는 ‘성능을 입증해 한국철도표준규격(KRS)를 획득하는 조건’으로 사업을 발주했다. ‘기계는 우리가 인증을 받았으니, 제어회로는 당신들이 만들어 인증을 받으라’는 조건으로 인증 책임을 업체에 떠넘긴 것이다.

서울시의회 질의에 대한 서울도시철도공사의 답변

서울시의회 질의에 대한 서울도시철도공사의 답변

사업을 따낸 업체가 만든 시제품은 5호선 김포공항역에 설치됐지만 2017년 1월 발판이 열차와 충돌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같은해 10월 해당 업체는 기술력 부족, 경영 상의 이유 등으로 ‘계약당사자 사업포기 확인서’를 제출했다.

2017년 5호선 김포공항역에서 발생한 자동안전발판 충돌 사고 조사보고서 일부

2017년 5호선 김포공항역에서 발생한 자동안전발판 충돌 사고 조사보고서 일부

감사원 지적으로 자체 개발한 자동안전발판 설치 계획이 무산되면서, 공사에서 자동안전발판 관련 논의는 사라졌다. 무리한 사업 추진, 현장 파악 없이 추진계획 변경, 감사원 지적, 업체 포기 등 총체적 파행을 겪은 2017년 이후 4년이 지났지만, 현재 상황은 그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공사는 자동안전발판 설치를 포기한 업체에 6억8600만원을 정산(발주자 사유로 공사가 중단돼 공사 진행 상태까지 인정)한 후, 나머지 물량을 2018년 9월까지 설치하겠다고 서울시에 보고했다. 2017년 경영실적보고서에서는 “자동안전발판 재설치 방안을 강구 중”이라고 했고 2018년 서울시 감사에서는 ‘해소대책을 강구해 (문제를) 해소할 수 있음’, ‘문제점 해소를 위한 방안을 종합적으로 검토하겠음’이라 답했다. 또 ‘2019년 4분기에 자문을 의뢰할 예정’이라며 ‘결과에 따라 2020년 상반기 자동안전발판 설치여부 및 방법 등을 결정할 예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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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한 계획 중 현실이 된 것은 없다. 기존 업체 설치 제품을 이어받는 위험을 감수하려는 업체는 없었다. 연구도 진행되지 않았다. 지난해 7월 실시한 감사에서 서울시는 “감사일 현재까지 자동안전발판의 형식 결정을 위한 타지역 설치 사례 견학 5회, 자동안전발판 제작전문 업체 5곳 기술자문 외에 자동안전발판 설치를 위한 사업을 추진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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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안전발판을 신규 설치하려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한 대형 공사가 필요하다는 게 공사의 입장이다. 공사는 자동안전발판 사업을 재추진하지 않는 이유로 “접이식 안전발판은 정비원이 승강장에 진입(열차사고 위험)해야하는 단점이 있고, 슬라이드 안전발판은 공사비가 비싸고 단차가 발생하는 문제점이 있다”고 밝혔다. 공사 측에 설치가 어려운 이유를 물었다. 막대한 예산, 안전문 바퀴가 지나는 레일(가이드레일) 훼손, 연단 아래 설치된 장비를 유지·보수할 때 안전성 문제, 연단 두께 및 보강 방법, 지하역사 습기로 인한 장비 품질 저하 등 ‘안 될 이유’는 차고 넘쳤다. 한국철도공사(코레일), 대구도시철도공사 등 자동안전발판을 운용하는 곳과는 상황이 다르다고 한다. 지하철 역의 위치나 구조적 특징, 승강장 형태와 설치시기, 차량 형태·크기 등이 달라 동일한 공정 또는 발판 방식을 적용하기 어렵다는 취지다. 공사 관계자는 “자동안전발판 도입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할 수 있으면 다 하지, 안 할 이유가 없지 않나”라고 말했다.

자동안전발판 논의가 멈춘 4년, 기술 개발에 나섰던 민간 업체들은 하나둘씩 나가떨어졌다. 한 업체는 열차 충돌 방지 기능이 있으면서 기존 안전문 장치에 설치할 수 있는 ‘무경첩 접이식 자동안전발판’을 개발해 2017년 국토교통부가 지정한 교통신기술에 포함됐다. 안전성에 초점을 맞춘 제품의 높은 단가는 공공 발주에서 치명적 약점이었다.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이 업체는 자동안전발판 사업을 접었다. 코레일 일부 역에 자동안전발판을 제공해온 한 업체는 그간 서울교통공사 사업 수주를 꾸준히 시도해왔지만 안전성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업체 관계자는 “사실상 포기한 상태”라고 말했다.

우창윤 전 서울시의회 의원이 지난달 13일 3호선 경복궁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다. | 이수민 기자 watermin@kyunghyang.com

우창윤 전 서울시의회 의원이 지난달 13일 3호선 경복궁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다. | 이수민 기자 watermin@kyunghyang.com

우창윤 전 서울시의회 의원은 “민간업체 제품이 비싸다며 공사가 자체 개발을 시도해놓고, 잘 안되니 그냥 깔고 뭉개고 있다. 결국 의지의 문제”라며 “지하철은 도시의 인식 수준을 드러내는 지표다. 한국 사회 고령화가 심해지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교통약자에 대비해 보다 적극적으로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사안을 바라보는 법원과 서울시의 시각은 엇갈린다. 지난달 19일 서울고등법원은 “서울교통공사가 도시철도 관련 법령을 위반하거나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서 정한 정당한 사유 없이 장애인에 대한 정당한 편의를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차별행위를 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한 반면, 2019년 7월 서울시 감사위원회는 “도시철도법 제18조 등에 의하면 차량과 승강장 연단 간격이 10㎝가 넘는 부분은 안전발판 등 승객의 실족 사고를 방지하는 설비를 설치토록 하고 있어 (공사의 해명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시민들의 인식도 나뉘어 있다. 지난 2월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시위로 인해 4호선 열차 운행이 지연되고 있다”는 공사 트위터 공지·열차 안내방송에 어떤 이들은 “시위가 아니라 설비가 안된 것”, “애초에 잘해놨으면 시위도 없을 것”, “이런 말보다 ‘장애인도 비장애인처럼 자유롭게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이 듣고 싶다”고 답글을 달았다. ‘권리를 주장한 교통약자을 향해 혐오를 조장한다’는 지적도 적지 않았다. 반면 장애인 단체의 시위 소식을 전한 네이버 뉴스에는 “덕분에 30분이나 집에 늦게 갔다”, “애꿎은 시민들한테 불편을 주면 안된다”, “장애인들 시위는 민폐” 등 불만 섞인 댓글이 많았다.

서울 지하철 곳곳의 ‘크레바스’에는 17년 전 멈춘 도시철도건설규칙(10㎝ 룰), 예외조항을 숭숭 뚫어둔 장애인차별금지법, 공사의 무리한 자동안전발판 사업 추진과 실패, 낡은 지하철 역사의 구조적 요인과 기술적 한계, 공사의 부작위(해야할 일을 하지 않음), 사법의 경직성과 행정의 무능, 교통약자 이동권을 향한 부정적 여론이 켜켜이 쌓여왔다. 그 틈에서 두 바퀴는 수년째 헛돌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인터랙티브 <두 바퀴엔 절벽 같은 ‘28cm’(https://news.khan.co.kr/kh_storytelling/2021/crevasse/)>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 바퀴엔 절벽 같은]'자동안전발판' 4년째 감감무소식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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