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결정된 ‘이건희 미술관’…눈 씻고 찾아봐도 ‘지역인지감수성’은 없었다

배문규 기자

지역 인사 1명도 없는 결정위원회 구성에 공론화 절차도 안 밟아

‘이건희 기증관’ 건립 후보지로 선정된 두 곳 중 한 곳인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

‘이건희 기증관’ 건립 후보지로 선정된 두 곳 중 한 곳인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

올 상반기 ‘이건희 미술관’ 유치를 놓고 지방 각 도시들이 총력전을 펼쳤다.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출생지인 영남권에서 시작된 유치전은 삼성전자 사업장이 있는 경기 남부로 번지더니 여타 지자체 수십곳이 가세했다. 하지만 후보지는 결국 서울로 낙착됐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7월 ‘국가기증 이건희 소장품 활용방안’을 발표하고 ‘이건희 기증관’ 건립 후보지로 서울 용산과 송현동 부지 2곳을 선정했다. 기증품 2만3000여점을 통합적으로 소장·관리하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국립현대미술관과의 유기적 협력체제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지자체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문화 분권과 국가 균형발전 차원에서 지역 유치를 요구한 지역들에 대한 무시이자 최소한의 공정한 절차도 거치지 않은 일방적 결정”(부산시)이라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문체부는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이건희 미술관 후보지를 결정한 문체부의 ‘소장품 활용위원회’는 김영나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등 미술계 인사들로 구성된 위촉위원 7명에 문체부 관료와 국립중앙박물관장·국립현대미술관장 등 당연직 4명으로 구성됐다. 지역 여론을 대표할 만한 ‘지방 인사’가 없었으니 결과는 처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관심이 큰 사안임에도 공론화 과정조차 없었다. 미술관을 서울에 유치하는 대신 지역 문화격차 해소방안을 강구하겠다는 애매한 발표만 내놨을 뿐이다.

홍경한 미술평론가는 경향신문 칼럼에서 “접근성이 좋은 서울에 기증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문체부의 ‘서울 입지론’은 근거가 빈약하다”고 지적했다. 세계 각국에 지역경제를 이끄는 박물관·미술관이 적지 않은 것을 보면 접근성과 문화예술 향유는 상관성이 작다는 것이다. 산속의 작은 동네에 있지만 해마다 20만명이 찾는 미국 매사추세츠 현대미술관, 교통이 불편한 태즈메이니아섬에 있지만 현대미술을 과감하게 다뤄 관광객 필수코스가 된 호주의 ‘뮤지엄오브올드앤드뉴아트’ 등을 예로 꼽을 수 있다.

균형발전을 위해서는 정책 결정과정에서 ‘성인지감수성’만큼이나 ‘지역인지감수성’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이관후 전 경남연구원 연구위원은 “정부 부처가 정책 결정을 위해 위원회를 구성할 때 보면 위원들이 대부분 수도권에 있는 전문가들인 경우가 많다”며 “이건희 미술관 결정은 지역인지감수성이 결여된 대표적인 결정”이라고 했다.

특히 지역인지감수성이 결여됐다는 비판을 듣는 곳이 예산을 다루는 기획재정부이다. 기재부 공무원들은 지역에 분국이나 사무소가 없어 지방을 경험할 기회가 없다. 자치단체들은 기재부 관료들이 지방 실정을 모르니 예산 배정 등에서 비수도권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없다고 비판한다.

수도권 집중 심화로 지역인지감수성은 정치적 지향을 가리지 않고 약화되고 있다. 관료, 교수, 기자 등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집단들 중 수도권 바깥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 위원은 “수도권 인구가 전체의 절반을 넘어서면서 이젠 의식적으로 강조하지 않으면 지방은 보이지 않게 될 것”이라며 “정부 위원회에 참가하는 위원들의 자격에 지방 거주 기간 등 조건을 넣을 필요도 있다”고 말했다.

이건희 미술관 유치전에서 교훈을 찾지 않으면 지방소멸은 막을 수 없다. 지난해 통계를 보면 전국 미술관의 41.5%가 수도권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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