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문편지는 군사독재 시절 문화”···여고생 향한 ‘온·오프 폭력’ 방치하는 군과 교육청

윤기은·박하얀 기자

학생에 욕설·성희롱 난무

유관기관은 ‘방관’ 소극적

군인 상대로 한 위문 문화

전문가 “군부시절의 잔재”

군 인권 개선부터 나서야

서울 소재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고생이 군 장병에게 보낸 위문편지라며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사진. 온라인 커뮤니티

서울 소재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고생이 군 장병에게 보낸 위문편지라며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사진. 온라인 커뮤니티

한 여고생이 군에 보낸 위문편지 내용이 공개된 이후 해당 학생과 소속 학교를 상대로 온·오프라인에서 폭력이 이어지고 있다. 여고생의 ‘정서적 위로’로 장병 사기를 끌어올리겠다는 취지의 구시대적 행사를 60년 넘게 이어오고 있는 학교와 교육당국의 방관이 피해를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3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편지를 쓴 것으로 추정되는 학생의 이름, 나이, 사진 등 신상정보가 올라왔다. 같은 커뮤니티에는 해당 여고에 찾아갔다는 ‘인증샷’이 게재되는가 하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이 논란을 다룬 기사에는 욕설과 성희롱이 난무했다. 해당 학교가 위치한 지역의 보습학원에서는 같은 학교 학생 1명을 퇴원시키는 일도 있었다. 원장 A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논란의 편지를 작성한 사람과 생각이 비슷하다는 취지로 이야기한 학생을 더 이상 지도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번 논란은 지난 11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위문편지 한 장이 올라오면서 시작됐다. 편지에는 “눈 오면 열심히 치우세요” “인생에 시련이 많을 건데 이 정도는 이겨줘야 사나이”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일부 네티즌들은 “군인에 대한 조롱”이라며 반발했다. 위문편지를 쓰게 한 학교는 “1961년부터 해마다 이어져 온 행사로 조국의 안전을 위해 희생하는 국군 장병들께 감사하는 활동”이라면서 “일부 부적절한 표현으로 행사의 취지와 의미가 심하게 왜곡된 점을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전문가들은 군인을 상대로 한 위문 문화가 시대착오적이라고 평가했다. 김민문정 한국여성단체연합 대표는 “위문편지를 비롯한 위문 문화는 군 중심의 제도를 강화했던 군부독재 시절의 잔재”라며 “교육당국은 유신 잔재를 관행으로 가진 학교가 더 있는지 살피고 같은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회성 위무가 아니라 장병 인권을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의 양지혜 활동가는 “위문 행사는 자유를 통제 당하는 군사주의 문화 속 단 하루의 욕구 해소책”이라며 “군 인권 개선 등이 병사를 위로해줄 수 있는 것이지 여학생이 위로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방혜린 군인권센터 상담지원팀장도 “군인 사기 진작이나 병영 복지는 군 내 환경이 개선돼야 하는 부분인데 이 같은 과정은 생략됐다”고 짚었다.

위문편지 작성을 강요하는 행위가 가부장제 사회가 요구해온 성역할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여성학 박사)은 “(위문편지 문화는) 남성이 여성을 보호해야 하고, 여성은 남성에게 위로와 격려를 준다는 젠더 역할을 드러낸다”며 “어떤 성별이든 감정 수고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지난 12일에는 여고에서 보내는 위문편지 자체를 금지해달라는 요구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왔다. 청원인은 “편지를 쓴 학생에게 어떤 위해가 가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위문편지를 써야 하는 것은 큰 문제라고 본다”고 밝혔다. 13일 오후 4시 기준 약 10만4000명이 이 청원에 동의한 상태다.

유관기관들은 이번 사건을 소극적인 태도로 방관하고 있다. 서울시교육청 관계자는 “해당 사안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고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무엇을 할지 논의하겠다”면서도 “사립학교라 (지도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국방부 역시 이번 논란에 대해 “개별 부대와 학교 간 협약이라 관리·감독이 어렵다”고 선을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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