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14)부산 광복동 (상)

-낡은 조개껍질같은 추억의 뒷골목-

부산의 대표적 상권, 광복동. 이곳은 가로수가 하나도 없다. 눈에 보이는 건 상점의 크고 작은 간판뿐이다. 그러나 광복동은 젊음의 거리, 패션의 거리만은 아니다.

이 길이 전설처럼 품고 있는 내력, 피란시절 맨몸뚱아리 하나로 섰던 거리, 호기심으로 뚫어지게 쳐다보았던 보석가게, 카메라가게, 화려한 옷가게. 상가 곳곳에 숨은 섬처럼 흩어져 있는 문화공간이 있기에 광복동 거리는 추억할 만하다.

#일본인이 만든 인조거리 광복동

광복동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도시계획’이 시행된 곳이다. 1900년대 초반만 해도 개펄이었던 곳을 일본인들이 1905년부터 30여년간 메워 새로운 길과 동네를 만들었다.

광복동의 본적은 동래군 부산면. 고종 14년(1877년) 1월30일 부산구 조계 조약에 따라 일인들이 조차지라는 명목으로 거류지로 정해 왜식으로 변천정 1정목, 2정목, 3정목이라 하였다. 1947년 7월20일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해 광복동 1가, 2가, 3가로 고쳤다. -한국지명요람, 한국땅이름큰사전 참조-

해방후, 동명 개칭때 일본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번창한 곳에서 조국 광복을 기린다는 뜻에서 이 지역을 광복동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곳의 땅이름은 해방과 함께 광복을 맞았지만 거리는 그렇지 못했다. 1960년대 이미 번듯한 상가가 형성된 상업중심지였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왜색을 탈피하지 못했다. 외국을 드나들던 선원들이 부산항을 통해 갖고 들어온 일제 전자제품과 고급카메라 등 ‘신식’ 물건들이 가게 쇼윈도를 장식한 탓이다.

옛시청 쪽에서 들어오는 광복동 입구엔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동광동 쪽으로 난 골목길은 일본서적 골목으로 통한다. 아직도 한 두군데 일본잡지 등을 파는 가게가 구멍가게처럼 남아 오래된 세월을 버티고 있다.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카메라가게들은 40~50년의 역사를 지닌 ‘광복동의 골동품’과 같은 존재들이다.

광복동길을 걷다 용두산공원에서 내려오는 계단을 지나 이쯤에 다다르면 젊음의 거리라는 이곳에 머리 희끗한 할아버지들도 몇몇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 뒤에서 하는 얘기를 들어보면 대개 이렇게 시작된다.

“옛날에 말이야, 내가… 예전에 이 골목에 있던 가게가… 이 자리에 말이지…”

안 봐도 안다. 그 분들의 눈가엔 왕년에 한가닥 하셨던 그 때 그 시절이 오래 묵은 때처럼 묻어 있는 것을.

#다방문화가 꽃피던 시절

이런 광복동은 6·25전쟁때 피란민들이 몰려들면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거리에 다방이 하나 둘씩 들어서고 자연히 문화 예술계 인사들의 쉼터가 되었다.

김동리의 대표적인 단편 가운데 하나인 ‘밀다원시대’의 무대가 된 밀다원다방을 비롯, 소설가 이호철씨가 황순원 선생을 만나 작품을 보였다는 금강다방, 역시 문인들이 많이 모였다는 스타다방 등이 광복동에 몰려 있었다.

박철석 동아대 교수(시인), 임명수 시인에 따르면 밀다원다방은 남포동 입구의 서울깍두기에서 광복동 길목으로 나오는 곳, 즉 현재의 로얄호텔에서 옛시청 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문학평론가 김병익의 한국문단사에는 당시 광복동의 문인들의 표정이 선명히 나타나 있다.

“이들은 어디서고 밤을 지내면 ‘낯수건과 칫솔이 들어 있는 낡은 손가방 하나’를 들고 ‘금강’ ‘춘추’ ‘녹원’ ‘청구’ 등 바다가 보이는 다방으로 흩어져 하루를 보냈는데(중략) 이 다방은 당시 갈 곳 없는 문인들의 안식처였고, 찾기 힘든 동료들의 연락처였으며, 일할 곳 없는 작가들의 사무실이었고, 심심찮게 시화전도 열리는 전시장이기도 했다. 이들은 여기서 원고를 썼고, 약간의 고료가 생기면 차나 가락국수를 시켜 먹고 혹은 선창가의 대폿집에 들어가 ‘피란살이의 시름과 허탈·자학·울분’을 동동주에 띄우며 ‘예술대회(유행가 부르기)’를 열기도 했다”

네온사인 번쩍이는 술집과 오락실이 들어찬 이 거리에 한 시대의 낭만이 존재했다니…. 지금은 케케묵은 얘기 같지만 바로 여기에 상업중심지 광복동의 존재 의의가 있다. 그냥 상업지대가 아니라 피란시절 ‘문화의 단칸방’과 같았던 곳…. 그런 내력을 간직한 상가…. 다시 그 길을 걷는다. 단 한군데라도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더라면 좋으련만…. 돌아서며 이내 안다, 금싸라기땅에서 그런 것은 욕심이라는 것을.

다방들은 9·28수복 후 서울로 옮기거나 사라졌다. 그러나 그 분위기는 자양분으로 남아 60~70년대 태백다방, 등대다방, 백조다방 등을 거쳐 고전음악감상실, 민속주점 등으로 젊음과 낭만의 문화를 꽃피운다.

/부산/이동형기자 s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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