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울뿐인 민생이 아닌, 노동입법의 정치
한 달 후면 21대 국회도 마무리다. 곧 22대 국회가 출범한다. 그러나 지난 4년의 모습을 답습하면 안 된다. 되짚어 보면 21대 국회 입법 과정에서 여야의 눈치로 차별금지법은 좌절되었고 노조법 2·3조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가로막혔다. 정부 부처와 관료조직의 소극적 행정 또한 제도의 지체에 영향을 끼쳤다. ‘아프면 쉴 권리’를 위한 상병수당 시범사업은 구멍투성이고 전국민고용보험은 소리 없이 정책에서 사라졌다. 이 모두 우리 사회가 차별이 아닌 평등으로 나아가야 할 바로미터인데도 말이다.21대 국회 평가는 여러 잣대가 있겠지만 입법성과만 살펴보자. 지난 4년 동안 국회에서 약 2만6783건의 법안을 다루었다. 그러나 법안 처리는 36.1%(9676개)에 불과하고 그 외 다수는 처리되지 못했다. 문제는 시민의 삶과 밀접한 고용노동과 보건복지 법안들 대부분이 계류된 점이다. 통과 법안 다수는 경제·산업, 건강·안전, 인권·참여 분야다. 그에 비해 복지돌봄과 고용노동 분야는 ... -
시대정신이 사라진 나라
한때 ‘시대정신’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중요한 선거가 다가오면 사람들은 시대정신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황혼에야 날개를 펴듯, 시대정신은 그 시대가 저물 때에 비로소 알 수 있다고 헤겔은 말했다. 그러나 그것을 미리 알아채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고, 그 비밀을 먼저 손에 쥐면 시대의 리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시대정신을 제대로 구현할 자신이 있든 없든, 일단 그것을 천명하려고 노력했다. 권위주의에서 보통사람들의 시대로, 다시는 군인이 권력을 잡을 수 없는 문민통치의 시대로, 평화적 정권교체로 증명된 민주주의의 기반을 다지고 관치를 넘어 공정한 시장경제의 틀을 만드는 것, 선거 때 표만 던지는 유권자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이 만들어 가는 민주주의, 이런 것들이 시대정신이었다.어느 순간 시대정신이라는 말이 사라졌다. 시대는 역행했다. 이명박 후보의 747 공약은 박정희 개발독재 모조품이었고, 박근혜 후보는 박정희 향수의 결정체였다. 민주화... -
지금이 사과 타령이나 할 때인가
지난달 베란다 화분에 홍로 사과나무를 옮겨 심었다. 지난 2년간 뒤뜰에 있던 것인데 일조량이나 기온 탓인지 도통 꽃을 피우지 못해서다. 북쪽에선 싹 틔우기도 힘드니 꽃이 필 리 없다. 올해는 홍로를 맛볼 수 있을까.올해만큼 이토록 화려했던 봄은 내 일찍이 못 봤다. 진달래, 개나리가 벚꽃과 동무가 되고, 목련이 채 피기도 전 벚꽃잎이 봄바람에 휘날린다. 조팝꽃이 산수유보다 일찍 향을 뽐내질 않나. 온통 뒤죽박죽이다. 봄의 전령들은 어쩌다가 이런 철부지가 됐을까. 덕분에 봄나들이는 멋지게 즐겼지만 왠지 씁쓸하고, 슬슬 불안해진다.누구는 <침묵의 봄>(1962)을 우려했어도, 우리는 이 ‘화사한 봄’을 더 걱정해야 할 판이다. 만일 봄 기온이 갑자기 3도 정도로 떨어져 수십일 지속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까. 농작물은 태반이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할 것이다. 어떤 영화처럼 자전축이 틀어지거나 하는 사태가 아니어도 이런 위험이 불현듯 닥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요... -
돌고래가 원고가 되는 세상
전 세계 기후소송이 2만2000건을 넘어섰다. 기후소송은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을 방지하거나 이미 발생한 손실에 대해 책임을 묻는 소송으로, 최근에는 공공 과실 또는 국가 과실 주장이 주를 이루고 있다. 국가가 기후위기로부터 시민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법에 근거해 과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달 23일 기후 헌법소원 변론이 열려, 국가의 온실가스 감축목표가 미진해 헌법과 기본권을 침해하고 미래세대에게 희생을 강요한다며 정부에 항의했다. 2020년 3월 소송을 제기한 이후 4년 만에 청소년과 시민, 영유아, 법률가 등이 함께 입을 모았다.유럽인권재판소가 스위스 정부가 기후변화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해 인권을 침해했다고 판결했다. 독일의 헌법은 국가가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고 자연과 동물을 보호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필리핀에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밀림개발을 막는 재판에서 승소했다. 뉴질랜드에서는 원주민 마오리족의 터전인 황거누... -
서정춘이라는 시인
외출했다 돌아오니 책상에 흰 편지가 놓여 있다. 인정머리 하나 없는 인쇄체의 청구서 따위와는 확 비교되는, 정겨움이 폴폴 나는 시인의 손글씨였다. 봉투를 뜯으니 어느 신문의 서평 스크랩이 나왔다. 내가 식물에 관심이 많은 걸 알고 가끔 이렇게 챙겨주신다.시인을 처음 소개해준 이가 전해준 남도 여행의 일화. 시끌벅적한 식당에서 조금 일찍 수저를 놓고 시인은 일어나 마당으로 나간다. 이 지역과 연결된 자잘한 화단의 근황부터 종내에는 큰 나뭇잎의 뒷꼭지까지를 요모조모 살핀다. 송아지의 귀를 살피듯 잎사귀의 털을 매만지면서 방금 놓은 숟가락과 잎은 왜 이리 닮았을까. 뭐, 그런 궁리도 하는 것 같은 시인의 뒷모습.봄이 되면 꽃소식이 먼저 들려오는 곳을 찾아 나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구례-순천을 연결하는 송치재의 보람찬 골짜기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얼레지 앞에 엎드리는데 시 한 편이 떠올랐다. “아버지 삽 들어갑니다/ 무구장이 다 된 아버지의 무덤을 열었다/ (…)/ 어... -
‘과일사막’을 막자
낮에 한여름같이 더운 4~5월에도 귤이 나온다. 청로다. 만생종인 이 귤은 당도가 15브릭스 정도로 높다. 적절한 산도도 있어 입안에서 느끼는 균형감이 절묘하다. 균형감은 긴 여운으로 이어진다.나는 청로 같은 감귤류를 초겨울부터 5월까지 즐기려고 한다. 퇴근하고 바로 감귤류를 먹으면 낮 동안에 쌓였던 스트레스가 씻겨나가는 느낌을 받는다. 딸기와 사과 같은 당과 산이 조화로운 과일을 먹을 때도 비슷한 효능을 느낀다.그런데 며칠 전 청로를 아내 대신 직접 사서 귀가했는데 가격에 놀랐다. 2㎏에 2만3600원이었다. 작년에 1만5000원 정도 했던 데 견줘 큰 폭으로 오른 것이다. 과일값은 올 초부터 큰 폭으로 올라 사회적 이슈가 돼왔다. 오름 폭도 컸지만 총선을 앞두고 정치적 이슈가 된 탓도 있었다. ‘애플레이션’(사과를 뜻하는 애플+인플레이션)이라는 신조어가 나올 정도로 민생 경제의 화두로 떠올랐다.실제 우리나라 과일 가격 상승률이 선진국 가운데 최악의 수준이다.... -
다시, 공부란 무엇인가
새삼 공부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내가 속한 작은 인문학공동체와 나의 공부에 대한 질문이다. 신도시 주택가에서 16년 전 처음 마을인문학 공동체를 열었을 때, 세상에서는 우리를 ‘공주(공부하는 주부)’로 불렀다. 당황했지만 현실이었다. 이후 ‘공주’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민은 “다른 공부가 다른 밥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졌고, 다시 모스, 마르크스, 폴라니 등의 공부로 연결되고, 또다시 마을작업장, 마을화폐의 실험으로 나아갔다. 이후 청년들이 오면 “청년들과 중장년 세대의 연대”라는 화두를 붙잡고, 또 밀양과 엮이면 “에너지 정의와 탈성장의 삶”이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공부가 진행되었다.마투라나와 바렐라는 진화란 자연선택이 아니라 자연표류라고 한다. 마치 산꼭대기에서 물을 한 방울 떨어뜨리면 똑바로 흘러가다가 돌이나 나무에 걸려 진로를 바꾸기도 하고 비바람의 영향도 받으면서 불규칙하게 흐르듯이, 진화도 그렇게 진행된다는 것이다. 우리 공부 ... -
운조루 종부 할매
구례에는 영조 52년에 지어진 고택 운조루가 있다.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자가 새겨진 큰 뒤주로 유명한 집이다. 운조루의 주인 이씨 가문은 1년 소출의 20퍼센트인 쌀 서른여섯 가마니를 이 뒤주에 넣어 쌀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라도 가져가도록 했다. 오늘의 주인공은 이씨 가문의 종부, 이길순 할매다.나는 이 할매를 오래전 텔레비전에서 처음 만났다. 전국의 명문가를 찾아다니며 그 집만의 특별한 요리를 소개하는 프로였다. 멋진 고택에 어울리는 멋진 요리가 줄줄이 나왔다. 근현대사의 격동 속에서도 품격 있는 집안에서는 저렇게 손 많이 가고 귀한 음식을 해먹었구나, 어쩐지 배알이 꼴리는 것도 같았다. 구례 운조루라는 자막이 뜨더니 허리 질끈 묶은 일복 차림의 할매가 촬영팀을 끌고 밭으로 향했다. 할매는 볏짚을 걷어내고 괭이로 언 땅을 파헤치더니 무릎 꿇은 채 땅속 깊이 손을 넣었다. 할매는 그날, 유씨 가문의 별식이라며 겨울 무에 돋아난 연둣빛 싹을 잘라 데치고 무쳤다. 다... -
기후정치 성공을 위한 필요조건
제22대 총선이 끝났다. 결과는 여당 108석(36%), 야당 192석(64%)이다. 선거 전 ‘기후정치바람’을 비롯한 16개 시민단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기후공약을 두 가지 이상 제시한 후보는 696명 중 168명(24.1%)에 불과했다. 이 중 당선된 후보는 총 64명으로, 여당이 10명(15.6%), 야당이 54명(84.4%)인 것으로 분석됐다.기후정치는 기후변화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한 정책과 행동을 다루는 정치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탄소 배출 감축, 재생에너지 촉진, 환경보호 정책, 기후협상 및 국제협력 등이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지구온난화의 부정적인 영향을 최소화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촉진해야 한다. 범위를 좁혀서 보자면 탄소배출 감축, 그중에서도 압도적 비중(86.9%)을 차지하는 에너지 부문의 혁신이 기후정치의 최우선 목표가 되어야 한다.그러나 기후정치 위기가 심각하다. 지구온난화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고 있음에도 기후공약을 제시한 후보... -
(120) 삼각지로터리
같은 장소를 촬영한 사진이지만, 사진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기 어렵다. 1971년 흑백사진에는 둥글게 도는 고가도로가 보이는데, 가까운 쪽의 도로로는 지면과 연결된 육교를 통해 사람들이 오르내리고 있고 먼 쪽 도로에는 차들이 달리고 있다. 그리고 지상의 넓은 도로에는 버스가 지나고 있다. 2024년 사진에선 신호등이 설치된 넓은 네거리를 사람들이 건너고 있고, 왼쪽으로는 높은 아파트도 보인다. 두 사진은 서울 용산구 한강로1가에 있는 삼각지로터리를 북쪽으로 바라보고 찍은 것이다.로터리란 차량이 교차하는 지점을 원형으로 만들어 신호등 없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한 교차로를 말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에는 신촌, 청량리, 영등포 등의 부도심에 로터리가 조성돼 있었다. 로터리는 차량이 정차하지 않고 원형 교차로를 돌면서 직진, 우회전과 좌회전, 유턴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교통량이 많아지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이 때문에 서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