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아내, 그 흔적과 기억읽음

이광표 서원대 교수
[이광표의 근대를 건너는 법] 화가의 아내, 그 흔적과 기억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이란 작품이 있다. 그림을 보면, 가족을 소달구지에 태운 채 한 사내(이중섭)가 신명나게 황소를 끌고 있다. 목적지는 따스한 남녘. 달구지에 올라탄 부인과 두 아들도 한껏 즐거운 표정이다. 이중섭은 1954년 이 그림을 그렸다. 이중섭은 이 작품의 밑그림과 편지를 일본에 있는 부인에게 부쳤다. 가족들이 일본에 있었기 때문이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이중섭은 가족과 함께 서귀포에서 피란 생활을 했다. 이듬해 이중섭은 가난 등으로 인해 부인과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야 했다. 이 그림은 그래서 밝고 경쾌한 듯하지만 슬프고 아련하다. 이중섭 미술은 이렇게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이중섭 부부에게는 실례되는 얘기지만, 그들의 이별이 있었기에 이중섭의 절절한 미술이 태어날 수 있었다. 명작의 역설이라고 할까.

이광표 서원대 교수

이광표 서원대 교수

그 부인이 올해 8월 일본에서 101세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 이름 이남덕, 일본 이름 야마모토 마사코. 이중섭이 생전에 그렇게 그리워했던 이남덕이었다. 서귀포에 가면 이중섭 가족이 살았던 가옥이 있다. “이중섭 미술을 키운 건 8할이 그리움”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면, 서귀포 이중섭 가옥에서 우리는 이남덕의 삶을 좀 더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올해 8월, 화가 장욱진의 부인 이순경이 세상을 떠났다. 102세였다. 6·25 피란 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장욱진은 돈 벌 생각은 하지 않고 열심히 그림만 그렸다. 가정의 경제를 책임져야 했던 이순경은 1953년 서울 명륜동에 작은 가겟방을 얻어 책방을 차렸다. 이듬해 혜화동 로터리로 옮겨 동양서림(사진)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장욱진은 서울대 교수를 그만두고 남양주, 충주, 용인 등지를 오가며 창작에만 전념했고, 이순경은 동양서림을 지켜내며 꿋꿋하게 돈을 벌었다. 1970년대 초 어느 날 장욱진은 불경을 외우고 있는 부인을 목격했다. 좋아하던 술을 1주일 동안이나 끊더니 부인의 모습을 화폭에 옮겼다. 부인의 법명을 따서 ‘진진묘(眞眞妙)’라 이름 붙였다.

이순경은 1987년 믿음직한 직원에게 서점을 넘겼다. 1954년부터 함께 일해 온 직원이었다. 지금은 그 직원의 딸이 서점을 운영한다. 서점은 혜화동 로터리에 그대로 있다. 몇 해 전 깨끗한 간판으로 바꿔 달았지만 ‘since 1953’이란 문구는 여전히 선명하다. 예산 수덕사에 가면 초입에 수덕여관이 있다. 1930년대 말~1940년대 초 화가 나혜석이 머물렀던 곳. 당시 장욱진·이응노가 나혜석을 찾았다. 나혜석이 이곳을 떠나자 이응노는 1945년 이 건물을 매입해 여관으로 운영했고 6·25 때엔 피란처로 사용했다.

1958년 이응노는 부인 박귀희를 수덕여관에 남기고 파리로 건너갔다. 이응노는 파리에서 재혼했고 박귀희와 헤어졌다. 그런데 동백림 사건으로 대전교도소에서 2년 반 옥고를 치른 이응노는 1969년 몸을 추스르기 위해 수덕여관을 찾았다. 박귀희는 이응노를 정성껏 돌봐주었다. 몇 달 뒤 이응노는 다시 파리로 떠났고 박귀희는 수덕여관을 지키다 2001년 세상을 떠났다. 가슴 아픈 사연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수덕여관에 가면 바위 문자추상 같은 이응노의 흔적은 있지만 박귀희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렵다. 수덕여관에서 이응노를 기억하려는 사람은 많지만 박귀희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일까. 나는 수덕여관에서 이응노의 문자추상을 볼 때마다 박귀희의 삶이 떠오른다. 서귀포 이중섭 가옥에서도, 혜화동 로터리 동양서림에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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