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사람]번역과 일본의 근대

‘번역과 일본의 근대’는 일본의 사상·문화에 대해 영향력 있는 두 노(老)대가가 번역을 화두로 일본의 근대에 대해 짚어나간 흥미진진한 대화록이다. 대담의 발제·진행 역은 ‘일본문학사 서설’(시사일본어사) 등을 쓴 가토 슈이치(加藤周一). 상대역은 ‘전후 일본 지식사회의 천황’이라 불리는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대화는 아편전쟁에 대한 역사적 조명에서부터 시작된다. 서양에게 당한 것은 청국인데 ‘야단났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발빠르게’ 대응한 것이 일본이라는 것. “근대화의 첫걸음은 외국인교사, 유학생, 시찰단, 그리고 번역이었다”.

번역은 가장 강력한 근대화의 도구였다. 메이지 정부는 산하에 번역국을 두었다. 정부 부서들도 자체적으로 번역서를 앞다투어 펴냈다. 번역이 일종의 국가사업으로 이루어지면서 무수한 번역서를 쏟아냈다. 번역이 정보의 전달 장치가 아니라, 문화의 이질성에 대한 자각과 ‘비교의 관점’을 통해 상대국 국민보다도 상대국 문화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이라는 것을 메이지 시대의 선각자들이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마루야마는 이러한 번역 의식의 뿌리를 에도 중기의 유학자 오규 소라이(荻生 徠)에서 찾는다. 일본 지식인들이 한문을 일본식 한문 독법인 화훈(和訓)으로 읽는 것을 두고 오규는 그것은 중국어로부터 일본어로 ‘번역’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선언함으로써 중국어를 외국어로 새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를 가져왔다.

그런데 왜 메이지 시대는 비교적 진보 성향의 학자들 사이에서조차도 나르시시즘의 눈길로 회상되는 경우가 많을까. 이 두 석학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주지하다시피 메이지 시대는 내셔널리즘의 시대. 이 시대의 주요 문화현상이었던 번역 역시 내셔널리즘의 자장(磁場)에서 파악하는 시점이 요구돼야 당연한데도 이에 대한 논의가 배제되고 있다. 사실 오규의 선언은 화이(華夷)적 세계관의 극복이라는 내셔널리즘의 각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 중국어를 외국어로 인식함으로써 형식상으로나마 자기와 타자간의 수평적 관계가 새롭게 형성된다. 실제로 팍스 아메리카나의 기치에 주눅드는 오늘의 현실 속에서도 영한·한영 사전만큼은 정치적·문화적 우열과는 무관한 일대일의 동등한 관계를 주장한다. 그래서 베네딕트 앤더슨은 사전 편찬자와 저술가를 내셔널리스트 그룹의 필두에 올리지 않았던가.

이것에 그치지 않는다. 메이지 일본이 서양을 필사적으로 배우려했던 것은 위기의식뿐 아니라 근대적 지식의 선점을 통해 정체 상태의 중국에 대해 비교우위를 확보하고자 하는 지적 헤게모니 장악의 의도도 개재되어 있었을 것이다. 또한 근대 일본의 번역주의는 세계를 ‘일본/서양’의 양극구조로 파악하게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탈아입구(脫亞入歐)를 고착화시켰다. ‘번역과 일본의 근대화’라는 주제 못지않게 ‘번역과 제국주의’라는 주제도 중요한 것이다. 무엇을, 어떤 의도를 가지고, 어떻게 번역했는가하는 물음은 이제 관점을 바꾸어서 이 노대가들이 방담을 나누고 떠난 자리에 되돌아가 다시금 던져야 할 질문이다.임성모 옮김.

/윤상인/한양대 교수(일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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