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장만드는 여든한살 장대근 할아버지-
청계천으로 가는 길은 멀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신문사가 있는 정동을 지나, 정부 부처의 청사들, 서점들, 영화관들이 몰려있는 광화문과 종로통을 돌아가면 바로 청계천. 풍경은 잠깐 사이에 확 달라져 빌딩 숲은 오밀조밀한 만물상으로 바뀐다. 마치 컴퓨터 외장을 뜯고 복잡한 칩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다. 삼일빌딩으로 끝나는 빌딩 숲 종로통까지가 원근법이 지배하는 차가운 조감도라면, 온갖 공구와 재료, 자재가 그득 쌓인 골목들이 첩첩한 청계천은 혈관 하나하나까지 세세하게 그려진 인체해부도다. 그 모세혈관 같은 골목 한 귀퉁이 2층 ‘정일사’ 공방에서 여든한살의 장대근 할아버지는 53년째 세월의 영욕을 훈장에 새기고 있었다.
낯선 사람이 웬일이냐는 듯 한번 쓱 보고는 다시 갈고 다듬기를 계속하는 할아버지는 공방의 다른 공구들과 한몸인 것처럼 늘 그자리에서 말없이 손과 발을 움직인다. 청계천 사람들에게 프레스기, 주물틀, 몇백가지나 될 법한 조립품과 자전거, 용달차가 일상이듯이 할아버지에게도 훈장의 원형틀, 손망치, 페달 달린 마모기, 오른손의 낡은 골무, 은가루 쌓인 작업대는 일상인 것이다.
회벽에 걸린 훈장도표에는 무궁화대훈장부터 건국, 국민, 무공, 근정, 보국, 수교, 산업, 새마을, 문화, 체육훈장의 이름과 등급이 질서정연하게 나누어져 있었다. 할아버지의 손에 들린 지름 8㎝의 훈장은 치열했던 전투에서 잃은 팔다리, 건설현장에서 밤낮없이 흘린 땀방울, 심금을 울리는 영롱한 시구와 그림들, 그리고 지배자의 오만함까지 압축해 담아온 우리 역사의 금빛·은빛 소형 디스켓이다.
고향 경북 풍기에서부터 왼손잡이라 손재간 좋다는 말을 들었다는 작은 체구의 장할아버지가 훈장을 만들기 시작한 건 정부 수립 직후인 1949년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다. 14살에 상경한 할아버지는 사촌형 장명근씨(1990년 작고)의 금은방에서 세공일을 배우다 사촌형이 훈장 시제품 공모에서 당선되자 이 일과 인연을 맺게 됐다. 당시는 종로에 ‘대한 훈장제작소’라는 간판을 걸었다고 했다. “갑자기 전쟁이 터져서 사촌형과 훈장 만드는 기계, 공구들을 짊어지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더랬지”. 전쟁이 격렬해질수록 군인들은 피를 흘렸고, 훈장은 더 많이 필요했다. 밤낮없이 훈장을 만들어댄 할아버지에게도 이 시기는 ‘전쟁’이었다.
환도 후에 ‘정금사’로 간판을 바꿔 달고 지금의 청계천 관수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땐 기와집이 많은 주택가였는데, 우리 건물이 들어선 이후에 하나둘씩 가게와 공장이 들어찼다”고 할아버지는 옛 기억 한자락을 들추었다. 이승만 정권 시절에는 순경이 두명씩 파견나와 정문 경비를 섰고 할아버지는 출근할 때마다 어깨에 힘깨나 들어갔다고 했다. 정금사 근무자는 병역의무가 면제되었기 때문에 아는 사람들에게서 취직 부탁을 받기도 했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박정희 대통령때 정문을 지키던 순경들은 사라졌고, 70년대 중반 동업자의 파산으로 건물이 경매에 넘어가면서 ‘정금사’는 ‘정일사’로 이름을 바꾸고 새출발했다. 사촌형의 아들로 지금의 사장인 희관씨(63)가 훈장일을 배우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훈장이 남발된 전두환 대통령 시절인 86년 조폐공사로 훈장 제작 일감이 조금씩 넘어갔다.
그때 이곳 사람들은 ‘훈장 제작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과 표창을 받았다. 장할아버지도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모처럼 양복을 입고 중앙청에 가서 훈장을 받았지”. 자기 손으로 만든 훈장을 자기 가슴에 처음 달아본 것이다.
“이 일을 하려면 꼼꼼해야 해”. 처음 일을 가르칠 때부터 지금까지 ‘말없는’ 할아버지가 가장 자주 강조하는 말이다. 바로 아랫자리에 앉은 이희성씨(58)는 지난 66년부터 할아버지에게서 일을 배웠다. 몇년 후 차례로 이곳에 들어온 주우신씨(57)와 백인수씨(67)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그 옆 작업대에 순서대로 앉아있다. 장할아버지의 도제수업은 엄격했다고 한다. 손이 여문 만큼 눈매도 날카로운 할아버지는 제자들의 솜씨가 마음에 차지 않으면 조용히 밀어냈고, 이들은 역시 군말 못하고 다시 손을 봐야 했다. 플라스틱 박스에 한가득 쌓인 훈장이지만, 한개라도 함부로 다루면 과묵한 장할아버지의 잔소리를 꽤 오래 들어야 했다.
훈장의 재료는 순은이다. 금빛은 그 위에 도금을 했기 때문에 나는 색이다. 1층에서 프레스기로 찍어 올라온 훈장은 장식 안한 케이크처럼 동그스름한 형상만 갖추고 있다. 할아버지는 페달을 살짝 밟아 모서리를 조심스레 갈고 장식고리를 달아준 후 제자에게 넘긴다. “안경만 쓰면 아직 할 만하다”면서, 20년 가까이 쓴 뿔테안경을 고쳐 쓴 할아버지는 뒷면에 일련번호를 달고 다시 돌아온 훈장 바구니를 끌어당겨 세밀한 마무리에 들어간다. 작업대에 흩어진 은가루는 ‘늙은 제자’들이 슬슬 쓸어담아 병에 넣는다. 한가득 모아지면 녹여 다시 한번 훈장 만드는 데 쓰여질 것이다.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공휴일 없이 월요일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하루 8시간씩 일한다. 지난해에는 교원 정년단축 등으로 교사들이 무더기로 퇴직한 데다 정부 구조조정까지 겹치면서 훈장 서훈 대상자가 폭증하는 바람에 꼬박 여덟달을 야근까지 해야 했다.
부인이 미국 사는 자식놈 집에 다니러가버려 비어있는 집에 그냥 들어가기가 쓸쓸해서 가끔 소주를 마시고 퇴근하는 날도 있다. “자리 보전하고 누울 때까지 맨날 똑같겠지, 뭐”. 거창하게 훈장을 만드는 일이 천직이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장할아버지에게 훈장은 삶 그 자체였다.
“TV에서 훈장 수여하는 장면을 볼 때가 제일 좋아. 그런데 훈장 안받겠다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 서운해. 대통령이 싫더라도 훈장은 받아야지. 대통령이 아니라 나라에서 주는 건데”. 장할아버지는 마무리 손질을 마친 훈장 하나를 쓰다듬으며 내려놓고 다시 하나를 집어올렸다. 훈장 하나에 땀이, 아픔이, 환희가 새겨진다.
-[취재수첩]정부수립이후 38만개 수여-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전쟁에서 수훈을 세운 한 병사에게 “훈장을 받겠느냐, 100마르크를 받겠느냐”고 묻자, 병사는 지체없이 명예로운 훈장을 선택했다. 비스마르크는 형편이 어려워 보이는 병사에게 돈을 선택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다시 한번 물었다. 병사는 훈장 한개의 값이 얼마냐고 되물었다. 1마르크도 안될 거라는 대답을 들은 병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훈장과 99마르크를 주십시오”.
이 일화가 말하듯 훈장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면 그리 크지 않다. 모두 11종인 훈장은 대통령과 영부인, 외국 원수급에만 주어지는 무궁화대훈장을 제외하곤 건국, 국민, 무공, 근정, 보국, 수교, 산업, 새마을, 문화, 체육 등 각 분야마다 5등급으로 나누어진다.
가장 많이 나가는 3등급 근정훈장의 가격은 10만원이 조금 넘는 수준. 하지만 무궁화대훈장은 은으로 만드는 다른 훈장과 달리 순금으로 제작되며 루비, 자수정 등으로 장식해 한개 값이 1천5백만원에 달한다. 너무 무겁기 때문에 따로 패용할 은제 한벌을 만들어주는 것이 관례. 무궁화 대훈장과 각 분야의 1, 2등급 훈장은 목에 거는 것과 오른쪽 가슴에 패용하는 한쌍으로 이루어지지만, 3등급부터는 가슴에 다는 것 한가지다.
정부 수립 후 2000년 9월까지 훈장은 모두 38만1천4백8개가 수여되었다. 새마을훈장은 87년까지 2,376개가 나갔지만 88년 이후 2000년까지는 342개로 뚝 떨어졌다. 체육훈장은 86년 아시안게임때 462개, 88년 서울올림때 371개가 수여되었지만 93년부터 2,000년까지는 537개에 불과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79년 한해 나간 훈장은 1,882건이었으나 신군부가 들어선 80년에는 3,150건으로 대폭 늘었고 교원과 명퇴 공무원이 급증한 국민의 정부에서는 연평균 1만1천2백건이나 되었다.
또한 훈장을 분실하거나 손상시켜 재발급을 원하면, 담당기관에서 발행하는 확인서를 지참하고 재교부받아야 한다. ‘정일사’ 장할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훈장받은 당일 훈장을 잃어버리거나, 축하파티에서 술먹고 찌그러뜨리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무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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