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로 대설(大雪)이 지났다. 큰 눈이 온다면 아주 멋진 일이 생길 것만 같다. 명말(明末)의 문사 장대(張岱)는 야밤에 폭설이 내리자 흥을 못이겨 동정호로 눈을 구경하러 간 일을 ‘호심정간설(湖心亭看雪)’이라는 명문에 실어놓았다. 아무도 없는 눈 내리는 호수에 가보니, 벌써 정자에는 누군가 한 사람 앉아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장대와 같은 ‘바보’가 또 있었던 것이다. 그처럼 눈은 때로 현실을 한번쯤 벗어나 바보가 되게도 만든다.
눈 때문에 흥이 일어 바보스러운 짓을 하는 데는 나이를 따질 필요가 없다. 이경전(李慶全·1567~1644)이라는 분이 그렇다. 그는 선조때의 명상 이산해(李山海)의 아들로 큰 눈이 내렸을 때 특이한 체험을 하고 ‘대설에 천방사를 찾아가다(大雪訪千方寺記)’라는 글을 남겼다. 또 한강에서 썰매를 탄 일을 ‘노량강에서 썰매를 타다(露湖乘雪馬記)’라는 글로 남기기도 하였다. 두 편의 글에서 400년 전 사람들은 눈이 내렸을 때 어떠했는지 엿볼 수 있다.
앞의 글은 대설 속에 등산했던 일을 쓰고 있다. 동짓달에 며칠 동안 눈이 내리자, 갑자기 흥이 인 이경전이 말을 타고 문을 나섰다. 어린 손자들도 종의 등에 업혀 따라 나섰다. 길을 나서자 다시 큰 눈이 내려 큰아들 집을 찾으니 모여 있던 아들들이 반갑게 맞이하였다. 이때 일곱살 난 손자가 옷깃을 당기며 산에 오르자고 한다. 의기투합한 할아버지, 아들, 손자 삼대가 대설 속에 산을 오르기로 하였다. 무릎까지 파묻히는 눈에 겨우 서로 끌고 당기며, 열을 지어 산을 올라 절문에 이르렀다. 거기서 고승을 만나 차를 마신 다음, 만류하는 그들을 뒤로 하고 다시 고생고생 내려왔다는 것이다. 산을 내려와 눈덮인 산을 뒤돌아보며 그는 “한바탕 신선이 된 꿈을 깨고 난 것만 같았다”고 했다.
뒤의 글은 한강의 노량진 부근에서 썰매 탄 일을 썼다. 이해 겨울 큰 눈이 내려 몇 자를 넘게 들판을 덮었다. 무료하게 앉아있는 이경전을 친구들이 찾아왔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동네 아이들이 끄는 썰매(雪馬)였다. 그들은 썰매를 타고 노량진, 마포, 동작 일대를 신나게 돌아다녔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썰매 몇 대가 갑자기 앞에 이르렀다. 날 듯이 올라탔는데, 어디로 갈지 몰랐다. 나루의 아이들이 참새처럼 뛰어와 썰매를 둘러메고 달렸다. 얼음은 흰 비단을 다림질한 듯, 수정으로 매끈하게 갈아놓은 듯했다. 마치 허공에 올라 바람을 타는 듯 시원하였다. 편안하게 앉으니 침상에 있는 듯, 속도가 빨라 날아가는 새 이상이었다. 한평생 먼지구덩이에서 살아온 몸이 시원스럽게 묵은 때를 씻듯, 곤충이 허물을 벗듯 근심걱정이 사라졌다”
400년 전 늙은 할아버지들이 아이들이 끄는 썰매를 타고 한강에서 논 것을 호쾌한 멋으로 생각하고 이렇게 글로 남겼다. 이경전은 골짜기의 눈을 밟으며 아이에게 “다만 한스러운 것은 사람이 절로 여유가 없다는 게다”라고 독백처럼 말한다.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세모가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안대회/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