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훈칼럼]식객과 자객

〈본사 논설고문〉

대통령 일가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입히고 정권의 기반을 뒤흔든 이른바 ‘최규선테이프 사건’은 믿었던 식객(食客)도 자칫하면 자객(刺客)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세상사의 이치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믿는 도끼’에 발등찍히는 세상이라지만 대통령 당선자 시절 5인 보좌역중의 하나였던 인물이 그토록 충성을 바쳐 섬기던 ‘주군’일가를 향해 칼끝을 겨누었다는 것은 보통사람으로선 납득하기 어려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큰 정치인들은 식객을 거느리게 마련이다. 정치권력이 커지고 집권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식객의 숫자는 늘어난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상도동계니 동교동계니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식객으로 있다가 정치인으로 입신한 사람들을 하나의 계보로 묶어 부르는 명칭일 뿐이다. 이들의 끗발과 서열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가까이에서 ‘주군’과 신산(辛酸)을 같이했느냐는 밥그릇 수에 따라 정해진다. 이들의 공통된 희망사항은 주군이 권력의 정점에 올랐을 때 그 동안의 고난과 충성을 보상받을 수 있는 ‘완장’을 하나 얻어차는 것이다.

그 완장은 그 동안의 충성도와 기여도에 따라 장관자리일 수도 있고 금배지일 수도 있으며 당직일 수도 있다. 그도 저도 어려우면 정부 산하기관의 장이나 감사자리를 주기도 한다. 그러나 돌봐주어야 할 식객은 많고 자리는 한정되어 있는 것이 세상사다. 따라서 모든 식객에게 다 완장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다보니 공신록에 이름만 올라 있을 뿐 완장하나 못얻고 무작정 세월을 기다리는 식객도 있다.

그러나 설사 무관(無冠)의 식객들이라 할지라도 집권초기에는 결코 불만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언젠가 한번쯤은 자신에게도 기회가 올 것이라는 기대가 살아있기 때문이다. ‘주군은 결코 나를 잊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이들에겐 참고 기다리는 힘이 된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에 이르면 참고 기다리는 이들의 인내도 점차 임계점을 향해 치솟아 오르게 마련이다.

헌법상 우리나라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다. 그러나 5년제 대통령제를 채택한 이래 임기 마지막 날까지 대통령의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고 물러난 대통령은 거의 없었다. 임기 마지막 해만 되면 으레 측근들의 대형비리나 정권을 뒤흔드는 돌출사건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집권당 총재직에서 물러나거나 더러는 중립내각으로 위기국면을 수습하고 퇴임하는 날까지 최소한의 권력행사로 임기를 마치곤 했다.

그동안 대형비리를 저지르거나 돌출사건을 터뜨린 것은 대부분 식객출신의 측근이나 정권의 아킬레스건(腱)을 잘 알고 있는 인사들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해에 터진 한보사건에는 오랫동안 믿고 믿었던 식객출신 측근의 비리가 연루되어 있었다.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에게 치명상을 입힌 것은 평소 가까이 지냈던 어느 의사가 폭로한 녹음테이프였다. 그야말로 ‘믿는 도끼’에 발등찍힌 대표적인 경우였다.

‘최규선테이프 사건’에서 한가지 분명한 것은 대통령에 대한 배신감이 비리 폭로의 동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DJ에게 배신감을 느낀다”느니 “대통령 당선자 5인 보좌역중 나만 빼고 다 청와대에 들어갔다”는 등의 발언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녹음테이프의 진위여부는 앞으로의 조사과정을 통해 밝혀지겠지만 대통령의 아들이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통령가족의 도덕성은 치명상을 입게 되었다.

카이사르에게 치명상을 입혔던 브루터스이래 믿었던 식객이 자객으로 돌변한 사례는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 수없이 많았다. 맹상군의 계명구도(鷄鳴狗盜) 고사처럼 언제나 주군에게 충성을 바치는 식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충성에 대한 보상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그들은 쉽게 자객으로 돌변할 수 있는 것이 인간사의 진면목이다. 이번 최규선씨 사건에서 우리는 또 한번 식객에서 자객으로 돌변한 사례를 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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