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품에 안아본‘아버지의 달’

베트남 전쟁, 한국군의 월남 파병. 종전후 수십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적어도 우리에겐 아직 ‘진행형’이다.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후세 사가(史家)들의 엇갈린 평가 때문만은 아니다. 그 이데올로기적 논쟁을 훌쩍 비켜가는 또하나의 ‘전쟁 테마’가 파편처럼 남아있기 때문이다. 라이따이한. 우리는 지난 세월 그들을 ‘어둠의 구석’에 몰아넣은 채 그네들 삶에 애써 눈감아 왔는지 모른다. 그런 무관심과 냉대속에서도 그들 대부분은 부정(父情)을 그리워하며 꿋꿋이 살아왔다. ‘아버지의 고향’을 자랑스러워하는 라이따이한. 그들에 대한 따뜻한 관심과 배려는 우리 세대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도리이자 책무가 아닐까. 얼마전 친자소송을 통해 한국 국적을 취득한 한 라이따이한 청년의 삶을 조명해본다.

처음 품에 안아본‘아버지의 달’

이남섭씨(30·베트남명 레빈탄렌)는 요즘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작은 아버지 선물은 어떤게 좋을까’ ‘큰아버지 댁에는 또 무슨 선물을 하지?’. 추석이 가까워지면서 가족을 만날 설렘에 그는 밤잠까지 설치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해도 이 땅의 추석은 그저 ‘남의 나라 명절’이었다. 시장의 흥겨움도, 꼬리를 잇는 귀성길도 갈곳 없는 그에게는 구슬픈 풍경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도 가족이 생겼다.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고 처음 맞는 명절. ‘라이따이한’(한국 베트남 혼혈) 남섭씨는 지난 7월 친생자 인지청구소송에서 승소판결을 받고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호주에 사는 아버지는 이번 명절에 한국에 오지 못한다는 소식을 전해왔지만 한꺼번에 생긴 작은아버지, 큰아버지, 사촌형 등 수많은 식구들 곁에서 추석을 보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가슴이 답답하다. 얼마전 찾아간 동생뻘 친구 김인례(28·여)·인진(25)씨 남매를 생각하면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아버지를 찾겠다고 3개월 전 한국에 찾아와 단칸방에 살면서 서울 왕십리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그들. 그러나 아버지의 식구들은 그들의 존재를 거부했다. 아버지를 만날 기대에 부풀어있던 인진씨는 가슴에 피멍이 맺혔는지 며칠전 폐암 말기 선고를 받고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 비정한 아버지의 고향. 남섭씨 역시 아버지의 가족으로 인정받기까지 아픈 세월을 견뎌야 했기에 인진씨의 고통은 곧 그의 아픔이다. 그에게도 지난 날은 참으로 가슴아픈 나날이었다.

#베트남, 그 아픈 추억

아버지는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자동차 회사에서 잠시 일하고 있었다. 아침마다 신문을 배달해주던 어머니와 사랑에 빠진 아버지는 한국에 가족을 두고 어머니와 두번째 결혼을 했다. 그때가 1969년. 전쟁속에서도 사랑은 열매를 맺었다. 아이가 태어나자 아버지는 한국에 있는 아들과 똑같은 돌림자 ‘섭’을 써서 ‘이남섭’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75년 전쟁이 끝나면서 수많은 한국인과 함께 아버지도 한국으로 돌아갔다. 어머니와 아들에게 남은 것은 사진 한장뿐. 아버지의 편지는 다섯번을 넘기지 못하고 끊어져 버렸다.

전쟁으로 폐허가 돼버린 도시에서 어머니는 ‘월남쌈’을 만들며 생계를 이어나갔다. 혹시 남편에게 연락이 올까싶어 이사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어머니. 남섭씨가 제법 말귀를 알아들을 나이가 되자 어머니는 아들에게 입이 닳도록 이야기했다. “네 아버지는 한국사람이다. 용감하고 따뜻한 분이셨다. 언젠가는 꼭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한국 아버지의 아들’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처음 품에 안아본‘아버지의 달’

#한국땅, 아버지와 재회

남섭씨는 고교 졸업후 라이따이한 직업학교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공부를 잘 하면 한국에 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였다. 1년에 4명을 선발하는 시험에 그는 당당히 합격을 했다. 낡아빠진 흑백사진을 소중하게 지니고 93년 처음으로 한국땅을 밟았다. 비행기 창밖으로 본 하늘. 아버지 나라의 하늘은 왜 그리 눈이 시도록 푸른지, 까닭모를 눈물이 옷깃을 적셨다.

금방이라도 아버지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 1주일 만에 베트남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그는 그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1년후 다시 찾은 한국. 3년 동안 경기도 안산의 한 공장에서 일하며 주말에는 아버지를 찾아 헤맸다. 달랑 갖고 있는 것이란 30년 전 주소 하나. 사람 찾기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세월은 속절없이 지나갔다. 몸과 마음이 지쳤다. ‘이제 기다리지 말자, 찾지도 말자’.

그러나 그에게도 ‘기적’은 찾아왔다. 연수기간이 끝나고 베트남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어느날 아버지가 찾고 있다는 전화 한통을 받았다. 그날 남섭씨는 혼자 오랫동안 울었다. ‘이젠 됐다, 됐어…’. 아버지가 어머니와 아들을 잊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1주일 뒤 호주에 이민갔다는 아버지가 남섭씨를 찾아 한국으로 왔다. 공항에서의 첫 만남. 꼭 닮은 모습.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얼싸안고 흐느끼기 시작했고, 흐느낌은 이내 통곡으로 변했다.

#이남섭, 한국의 아들로

어머니는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어린아이처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정신나간 사람처럼 울다 웃다를 반복하는 어머니. 그러나 아버지와 전화통화를 해보겠냐는 말에는 영락없이 도리질이었다. 아버지는 남섭씨를 아들로 인정하고 싶다고 했다. 친생자 인지청구소송을 해서 인정 받으면 아버지 호적에 이름을 올리고 한국 국적도 얻을 수 있었다. 평생 그렇게 원하던 ‘뿌리’를 찾을 수 있다는 말에 남섭씨는 용기를 냈고, 결국 결실을 맺었다.

수원에서 산업연수생으로 일하는 남섭씨는 요즘 공장 앞 대청마루에 누워 달을 바라보곤 한다. 추석날 가족들을 만나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울 것을 상상하니 미소가 입가에 절로 배어나온다. ‘아버지, 어머니에게 편지도 써야지…’. 그는 달을 보며 또다른 소원을 빌어본다. 인진·인례 자매를 생각하며, 그리고 아버지를 찾고 있는 수많은 라이따이한들이 자기처럼 행복해지기를 바라며…. 그 사이 달은 하루가 다르게 둥그레지고 있었다.

-[취재수첩]한국계 혼혈아 많게는 2만명…아버지찾아 공장생활도 간내-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남겨진 한국계 혼혈아는 작게는 3,000명, 많게는 2만명으로 추산된다. 정확한 숫자마저 계산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살아온 그들. 경제적 고통과 사회적 냉대에도 잡초처럼 살아남은 라이따이한들은 이제 3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이들은 빛바랜 사진, 30년 전 주소를 유일한 희망으로 아버지를 찾아 한국으로 오고 있다. 대부분 서울 왕십리 봉제공장, 경기도 안산 기계공장 등지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아버지를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고통스러운 생활을 버텨 나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아버지를 찾기가 쉽지 않은데다가 설사 아버지를 찾았다 하더라도 친생자로 인정받는 경우는 드물다. 하루라도 아버지의 아들로 살고 싶어하는 라이따이한들. 우리가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민족 최대 명절인 추석을 맞아 한번쯤 가슴속 깊이 생각해보자.

/김정선기자 kjs0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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