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남대총 쌍분의 주인공](https://img.khan.co.kr/news/2003/08/11/3h1228a.jpg)
가장 명명백백한 삼국시대 왕의 무덤은 1971년 발견된 백제 무령왕릉이 유일하다. 고구려의 경우 만주 지안(集安)에 있는 장군총과 태왕릉이 장수왕·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알려지고 있을 뿐. 신라의 경우 무덤 앞에 비석이 마련된 태종무열왕이나 비석편이 출토되어 알 수 있었던 흥덕왕 외 몇몇 무덤뿐이다.
◇이름모를 부부묘=왜 고대 왕릉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을까. 미래에 닥칠 못된 후손들의 마구잡이 도굴을 염려했기 때문일까. 신라의 경우 왕 혹은 왕비, 또는 왕족이 묻혀있을 것으로 판단되고 있는 중·대형의 봉토고분은 경주시내 평지에 대부분 남아있다. 과거 일제시대 조사된 무덤 수량은 155기 정도. 이들 가운데 사적 제40호로 지정된 황남동 고분군은 현재 신라 고분공원으로 조성되어 많은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 가운데 황남대총은 신라최대의 쌍분, 즉 부부묘로 표형분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이 황남대총은 경주관광 10개년 개발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즉 학술발굴조사를 통해 무덤의 성격을 구명하고 이를 토대로 내부를 공개해 관광자원화 하자는 계획이 마련되었다. 발굴에는 1973년 7월에서 75년 10월까지 무려 2년4개월이 소요되었다. 이것은 국내 고분발굴 사상 단일 무덤으로서는 최장 조사기간이다. 발굴 동원된 인원만 총 3만3천여명. 출토유물은 순금제 금관을 비롯해 실용적인 은관(銀冠), 실크로드를 통해 수입된 것으로 보이는 로만그라스 등 무려 7만여점이 쏟아졌다. 특히나 유물 가운데는 비단벌레(玉蟲)를 잡아, 그 날개 수천개를 장식하여 무지개 빛처럼 영롱한 자태를 뽐내는 ‘비단벌레 장식 마구(馬具)’가 그 신비감을 더하고 있다.
 황남대총 쌍분의 주인공](https://img.khan.co.kr/news/2003/08/11/3h1228c.jpg)
◇남편묘엔 금동관, 부인묘엔 금관이=그런데 희한한 일이었다. 부인의 무덤으로 밝혀진 북분에서 순금제 금관이, 남자무덤인 남분에서는 금관 대신 도금한 금동관(金銅冠)이 출토된 사실이다. ‘순금제의 금관 출토’=‘왕의 무덤’이라는 공식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원래 북분에서 금관이 출토됐을 때 이 무덤이 왕의 것이라는 데 이의를 다는 전문가들은 없었다. 하지만 발굴과정에서 함께 출토된 허리띠 장식품에 부인대(夫人帶·왼쪽위 작은 사진), 즉 부인의 허리띠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니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고대 중국에서 천자의 비(妃)나 제후(諸侯)의 아내를 부인이라고 하고 신라에 있어서도 왕의 어머니나 왕비를 부인으로 표기하고 있다. 결국 이 무덤의 주인공이 지체 높은 왕비이거나 그에 버금가는 여성의 무덤임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자연, 이 부부묘의 주인공에 관한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데 또하나 남분에서는 ‘주인공’을 추적할 수 있는 사람 뼈 20여편과 이빨 28개가 수습됐다. 분석결과 출토된 이빨 가운데 15세 전후의 여성 이빨 16개와 아울러 150㎝ 미만의 키를 가진 여성의 뼈가 관 밖에서 수습되었고, 60세 전후의 남성 머리뼈와 이빨 12개가 관 안에서 수습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분명 ‘순장(殉葬)의 흔적’이었다. 무덤의 주인공이 죽자 그가 사랑했던 젊은 여인이 무덤에 산 채로 묻혀 꽃다운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순장된 15세 소녀는 벽화(碧花)?=그러자 어느 발굴지도위원이 상상의 나래를 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21대 소지왕이 아닐까요”. 딴은 그럴 듯했다. 신라의 순장제도는 서기 500년 22대 임금으로 등극한 지증왕이 ‘폐지’를 선언함으로써 사라졌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제21대 소지왕(炤知王)의 애인인 16세 소녀 벽화(碧花)가 등장한다. 바로 그 ‘벽화’라는 소녀가 황남대총 남분에서 발견된 소녀 유골의 주인공이 아닐까.
삼국사기를 보자. 서기 500년 9월 어느날 소지왕이 지방 시찰차 날사군(지금의 영주로 추정)에 갔다. 그때 그곳에 사는 파로(波路)란 사람이 16세 되는 자기 딸을 비단에 싸서 왕의 수레에 넣어 바쳤다. 왕은 먹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으로 알고 받았다. 그래서 그것을 펼쳐 보았는데 놀랍게도 눈부시게 예쁜 소녀가 들어있었다. 왕은 놀라 받을 수 없다고 돌려주고 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잠자리에 들자 그 소녀의 빼어난 미모에 잠을 이룰 수가 없어 상사병이 날 지경이었다. 참다못해 결국 몰래 그 소녀가 있는 집으로 달려가 하룻밤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 소녀가 바로 벽화이며 관계를 맺고 난 다음 궁궐에 데려다 별실에 두어 살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지왕은 이 일이 있고 나서 2개월 후인 11월에 죽었다. 이때 벽화를 순장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벽화가 아들을 낳았다”는 기록도 있다는 점에서 이 ‘소지왕 설’을 부정하는 이가 많다.
◇“부인은 실력자, 남편은 고용사장”=다음으로 17대 나물왕(奈勿王)설과 19대 눌지왕(訥祗王)설에 대해. 먼저 나물왕이란 주장. 16대 흘해왕(訖解王)이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나자 13대 미추왕(味鄒王)의 조카인 나물이 왕위에 오른다. 또 미추왕의 딸은 나물왕의 비가 된다. 그러니까 4촌간으로 왕과 왕비가 된 것이다. 이 경우에서 볼 때 나물왕의 비(妃)인 보반부인(保反夫人)은 미추왕의 적통 직계 딸이고 왕은 조카이기 때문에 왕손에 있어서 신분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돌아간 나물왕과 후에 돌아간 왕비의 무덤에 묻은 부장품에 차별화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 이러한 신분 차이 때문에 왕비의 무덤에는 순금제의 금관을, 왕의 무덤에는 그보다 낮은 금동관을 묻었다는 주장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물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황남대총의 남분이 조성된 시기는 왕이 죽은 서기 402년이 된다는 의미.
 황남대총 쌍분의 주인공](https://img.khan.co.kr/news/2003/08/11/3h1228b.jpg)
“이런 가정은 어떨까요. 남자가 성골로서 왕이 되었지만 지위가 더 높은 부인의 도움을 받아 왕이 되었을 가능성. 그렇다면 왕은 지금으로 치면 고용사장이 아니었을까요”
갖가지 흥미로운 추측만 무성한 가운데 황남대총은 그 엄청난 위용만을 뽐낼 뿐 침묵을 지키고 있다. 발굴단은 당시 60대 남자·15세가량의 소녀 유골을 발굴이 끝나자마자 봉안함에 넣어 다시 무덤속에 파묻고 말았다. 정중한 봉안식과 함께. 당시는 인골을 고고학적 유물로 주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유골을 함부로 한다는 경주 김씨 문중의 차가운 시선 때문이었다. 유전자 분석이 고고학의 중요한 분야가 되는 오늘날 발굴이 이뤄졌다면 주인공을 가릴 어떤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고고학자 조유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