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부터 발끝까지 갑옷으로 중무장한 기병들. 소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말은 다리를 높이 들어 소녀를 덮친다. 부대는 굉음과 함께 소녀를 짓밟고 전진한다. 독립애니메이션 ‘하늘나무’의 한 장면. 미군 장갑차에 깔려 목숨을 잃은 미선·효순이의 창백한 얼굴이 떠오른다.
“원래는 구전설화 애니메이션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장갑차 사건과 촛불시위가 있었어요. 이어 미국의 이라크전쟁이 발발했습니다. 확 방향을 틀었죠. 당초 기획의 90% 이상이 바뀌었습니다”
독립애니메이션 감독 전승일(38). 그의 이름은 독립애니메이션의 역사와 통한다. 외국산 대형 애니메이션이 주류인 현실에서 그는 10년 넘도록 꿋꿋이 독립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다. 장기수, 부마항쟁, 자본주의의 그늘 등을 다룬 그의 애니메이션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말 뜻 그대로 애니메이션은 움직이는 그림. 그의 움직이는 그림은 양심의 ‘움직임’을 불러일으킨다.
전씨는 서울대 서양학과 85학번. “실기실에서 그림 그린 기억이 거의 없다”는 말처럼 그는 길거리에서 미술을 배웠다. 깃발, 걸개그림부터 포스터, 만화까지 이른바 ‘민중미술’이라는 것은 안해본 게 없었다. ‘문화운동’ 차원에서 애니메이션을 만들던 선배들을 따라 작업실도 들락거렸다. 밑그림도 그리고, 소품도 넘겨보며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 시작이었다.
서양학과 졸업작품전에 그는 애니메이션 ‘기억’을 내놓았다. 8㎜ 카메라를 들고 시위, 집회, 친구들의 모습을 찍고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옮긴 작품. 카메라 손잡이가 3번 부러질 만큼 열정을 쏟았다. 하지만 교수들은 고개를 저었다. 결국 원화드로잉을 애니메이션과 함께 전시하는 기형적인 형태로 졸업전을 치렀다.
“회화나 조각같은 순수예술은 대중과 소통하기가 힘들어요. 그에 비해 애니메이션은 대중매체가 아닙니까. 대중과의 소통을 전제로 했다는 점이 매력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해오던 민중미술 작업과 통하는 것이기도 했고요”
시나리오, 원화 작업부터 편집까지 홀로 만드는 독립애니메이션. 1990년대 초반 독립애니메이션은 기존 상업 애니메이션의 대안으로 출발했다. 사회적 이슈를 짚어내는 문화운동의 성격이 강했다. 전씨의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였다. 환경오염, 전쟁, 문명파괴, 인권 등이 그의 주된 소재다.
‘사랑해요’(1997)는 장기수 자녀들의 그림을 모아 만든 애니메이션. 서툰 크레파스 그림들 사이로 한국 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스쳐 지나가는 작품이다. 지난해 오타와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 상영돼 호평을 받았다. 비전향 장기수를 다룬 ‘그리운 얼굴들’(1995), 전쟁과 문명파괴를 그린 ‘순환’, 환경파괴를 다룬 ‘내일인간’ 등을 만들었다. 작품들은 국내외 영화제에 출품되며 그의 이름을 알렸다. 대학에서 애니메이션도 가르쳤고, 각종 영상제도 기획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고, 이제 그의 이름 없이는 독립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쓸 수 없게 됐다.
올해 만든 ‘하늘나무’는 그의 작품 중 가장 길다. 16분25초. 기획과 시나리오는 그가 했지만 여러 사람의 손을 빌렸다. 록밴드 ‘3호선 버터플라이’의 성기완씨가 음악을 맡고,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이 내레이션을 맡아주었다. 공장 노동자 소년과 제주 민간설화 자청비의 이야기를 결합한 작품. ‘하늘나무’는 10월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앵글 부문에 상영되어 호평을 받았다.
한때 뮤직비디오나 영화 삽입 애니메이션, 광고도 해보았다는 전씨는 “그건 아니다”라고 고개를 젓는다. 그의 꿈은 독립애니메이션이 극장에 걸리는 것이다. 저예산으로도 충분히 극장용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그는 자신한다. 원형감옥과 전자주민카드를 소재로 현실의 다중감시체계에 대한 애니메이션을 만들고싶단다.
그에 앞서 전씨는 12월 광화문 일주아트하우스에서 열리는 ‘이미지 액트’ 전을 꾸려내야 한다. 반전평화, 환경, 어린이 인권 등 공공 이슈를 주제로 한 영상제다. 그는 총괄기획을 맡았다. ‘하늘나무’와 함께 새 영상물도 직접 출품할 생각이다. 이라크전쟁 당시 녹화해 둔 뉴스 화면을 활용해 영상물로 만들어 보려고 한다.
“독립애니메이션은 문화운동으로 출발했어요. 예전엔 사회적 이슈를 많이 다뤘는데, 날이 갈수록 무뎌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애니메이션이 사회적 이슈, 공공적 이슈에 대한 관심을 게을리해서는 안되는 거죠”
▲설화소재‘하늘 나무’-장갑차·전쟁포스터…소년은 몸을 던지고
‘하늘나무’는 제주 자청비 설화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공장에서 일하는 소년과 설화 속 소녀의 이야기지만, 작품은 꿈을 말살시키는 현실을 겨냥하고 있다. 미군 장갑차 사건, 전쟁 포스터 등의 코드도 눈여겨볼 만하다.
‘나는 매일 공장에 일하러 갑니다’라는 소년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애니메이션. 전쟁포스터 공장에서 잉크통을 나르는 소년. 소년은 실수로 잉크통을 놓치고, 포스터는 잘못 인쇄된 채 계속 찍혀나온다.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온 소년은 벽에 포스터를 붙이며 자청비 이야기를 떠올린다.
소년은 ‘봉황을 살려준 자청비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다’라고 알고 있지만, 영상 속의 자청비는 침략군대의 말발굽에 깔리고 만다. ‘무서운 사이렌이 울리고 비행기 날아다니는 이곳이 싫다’는 소년은 ‘자청비처럼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라며 빌딩 밖으로 몸을 날린다.
‘하늘나무’는 땅의 사람들과 하늘의 꿈을 이어주는 우주수(宇宙樹). 지상과 하늘의 매개체다. 소년의 회색빛 공장과 자청비가 살고 있는 아름다운 나라의 대비가 돋보인다. 민화를 응용한 문양과 목판화를 연상시키는 터치가 인상적이다.
한국문화콘텐츠진흥원의 HDTV용 제작지원 작품이다. 전승일 감독이 사실상 혼자 운영하는 ‘미메시스’ 스튜디오의 작품. 원래 3편의 구전설화 시리즈물로 기획됐다. 전감독, ‘마리이야기’의 이성강 감독, 동국대 박사과정팀이 각각 1편씩 맡는 옴니버스 애니메이션. HD로 작업해 화질이 깨끗하고, 필름에 준하는 해상도를 보여준다. 다만 국내에 HD영화 상영관이 없어 제대로 구현해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11일 부천국제대학애니메이션페스티벌 ‘한국단편작가 초대전’에서 볼 수 있다. 15일에는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에서 레스페스트 디지털 영화제 초청작으로 상영된다.
〈글/최명애기자 glaukus@kyunghyang.com〉
〈사진 정지윤기자 color@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