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구로 동맹파업

1983년 말부터 시작된 이른바 유화국면은 노동운동에도 역시 눈부신 부활의 시기였다. 블랙리스트 때문에 수년간 취업을 원천봉쇄당하고 있던 민주노조 출신 해고 노동자들은 84년 1월 블랙리스트철폐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진정, 해고무효 확인소송, 유인물 배포, 대중집회 등의 방식으로 블랙리스트 철폐투쟁을 펼쳐나갔다.

또 3월에는 ‘기업별 노조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고 노동운동의 전국적·통일적 구심을 형성한다’는 목표를 내걸고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이하 ‘노복’)가 창립됐다. 전 원풍모방 노조위원장 방용석을 비롯해 70년대 민주노조 간부들이 주축이 된 ‘노복’은 노동자들의 정치의식을 높이기 위한 각종 교육사업과 노동법 개정투쟁을 전개했다.

[실록민주화운동] 60. 구로 동맹파업

한편 청계피복 노동자들은 노조 복구투쟁을 본격화했다. 5월1일 ‘청계피복노동조합의 합법성에 관한 공개토론회’를 개최한 데 이어 9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3차에 걸쳐 합법성 쟁취대회를 열었다. 합법성 쟁취대회는 경찰의 봉쇄 때문에 매번 가두시위로 변할 수밖에 없었는데 수천명에 이르는 참가 인원, 노동자와 학생들의 연대투쟁, 과감한 투쟁전술 등으로 노동운동은 물론 민주화운동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가운데 구로공단을 비롯한 경인지역 사업장에서는 노조를 결성하거나 어용노조를 민주화하려는 활동들이 활발하게 전개됐다.

서울 구로1공단에 있는 대우어패럴은 대우그룹 계열의 의류봉제 수출회사로 종업원이 2,000명에 이르는 봉제업계에선 규모가 큰 회사였다. 자본금 25억원으로 84년 36억원의 흑자를 냈음에도 생산직의 월평균 기본급은 7만2천원에 불과할 정도로 임금 및 근로조건이 열악했다. 그런데 84년 6월 그동안 꾸준히 준비를 해왔던 현장 활동가들이 유화국면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노조를 결성했다. 그리고 노조는 85년 봄 임금인상 투쟁을 성공적으로 진행함으로써 조직을 안정시키는 것은 물론 공단 내 섬유업체에서 월 10만원 이하의 저임금을 없애는 데도 선도적인 역할을 해냈다.

그런데 85년 6월22일, 느닷없이 경찰이 들이닥쳐 위원장 김준용을 비롯한 노조 간부들을 연행해갔다. 그중 위원장과 사무장, 여성부장이 구속됐는데 두달 전 임금인상 투쟁과정에서 벌인 2차례의 파업농성이 쟁의조정법, 집시법, 폭력행위 등에 관한 법률 위반에 해당되고 노조의 소식지 발행이 언론기본법을 어겼다는 것이다. 임투 이후 어느 때보다 노사관계가 평화롭던 시기에 두달 전의 일을 새삼스레 문제삼아 간부들을 구속한 것으로 보아 공안정책상의 결정임이 명백했다.

공안당국은 구로공단의 구심으로 떠오르고 있던 대우 노조의 뒷덜미를 친다고 했겠지만, 그러나 정작 기습을 당한 것은 그들이었다. 노조 간부들이 연행된 그날은 토요일로 공교롭게도 공단 내 민주노조 간부들이 합동교육을 받기로 돼 있던 날이었다. 대우어패럴 노조 대의원들이 비상대책회의를 여는 동안 효성물산·가리봉전자·선일섬유·청계피복 노조의 간부 200여명은 교육 장소에 모여 밤새 대책을 논의했다. 그리고 이전까지의 노동운동과 80년대 노동운동을 구분짓는, 노동운동사에 길이 남을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월요일인 24일 오후 2시를 기해 동맹파업에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효성물산·가리봉전자·세진전자·청계피복·선일섬유 노조가 공동으로 발표한 ‘노동조합 탄압저지 결사투쟁선언’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대우 노동조합 탄압은 80년의 저 무시무시한 노동조합 탄압을 되새기게 한다. 현 정권은 70년대의 민주노조들을 하나씩 차례로 깨부숴버렸다. …80년 이후 5년간 우리는 노동자의 기본 권리를 한 치도 허용하지 않는 암담한 현실을 뚫고 일어섰다. 갖은 탄압과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민주노조의 전통을 이어온 우리가 물러설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번 대우 노조 파괴음모가 모든 민주노조에 대한 사형선고와 같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런 마당에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 할 것인가? 임금인상조차도 못하는 노동조합으로 비굴하게 살아남을 건가? 가만히 앉아서 민주노조가 차례로 깨져나가길 기다리고 있을 건가? 우리는 그러한 어리석음을 두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는다. …민주노조 선진노동자들이여! 함께 일어나 싸우자! 천만 노동자의 동지애로서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실제로 70년대 민주노조들은 기업별 노조로서는 최고 수준의 조직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권력이 깨기로 마음을 먹으면 개별 기업 단위로는 제 아무리 강력한 노조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 뼈아픈 경험에서 나온 각성이 바로 동맹파업의 역사적 토대였던 것이다.

6월24일 아침 8시10분, 대우어패럴 노조가 먼저 2층 작업장을 점거하고 파업농성에 돌입했다. 이어서 효성물산·가리봉전자·선일섬유 노조가 각각 긴급총회를 열고 오후 2시부터 파업농성을 시작했다. 참가 규모는 대우어패럴 350명, 효성물산 400명, 가리봉전자 500명, 선일섬유 70명이었다. 파업농성장의 유리창에는 ‘구속자를 석방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 ‘노동악법 철폐하라’ 같은 구호가 내걸렸다.

다음날인 6월25일에는 3공단에 있는 세진전자·남성전기·롬코리아 노조가 동맹파업을 지지하는 시한부 농성을 벌였으며, 27일에는 성수동의 삼성제약 노조가 중식 거부로 연대투쟁에 동참했다. 이어 28일에는 구로3공단의 부흥사 노조가 지지 농성을 벌였다. 구로공단 일대에는 ‘구로지역 20만 노동자여! 다 함께 일어나 싸우자!’라는 제목의 연대투쟁 지지 호소 유인물이 광범위하게 뿌려졌다. 26일 저녁에는 가리봉 오거리와 공단입구 등지에서 학생과 노동자들이 참여한 수백명 규모의 가두시위가 벌어졌고, 27일에는 효성물산과 청계 노조 100여명이 노동부 중부지방사무소에 몰려가 노동부장관 면담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들의 신속하고도 과감한 연대투쟁은 민주화운동 진영을 크게 고무시켰다. 6월26일 민통련·민청련·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노복’·민언협·민불련·자유실천문인협의회 등 22개 민주·민권운동단체 대표 50여명이 청계피복 노조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연대파업 지지농성에 돌입했다. 경찰의 봉쇄 때문에 농성장에 합류하지 못한 단체들은 기독교회관을 비롯한 소속 사무실에서 지지 농성을 벌였다.

‘6·25 이후 최초의 동맹파업’이라는 평가까지 들었던 구로지역 민주노조들의 동맹파업은 6월29일, 물도 끊기고 전기도 끊긴 상태에서 닷새 동안 굶주리며 버티던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이 작업장 벽을 뚫고 진입한 관리자와 구사대들에 의해 강제해산당하면서 막을 내렸다(효성물산과 선일섬유 노조는 26일 밤에 농성을 풀었고, 가리봉전자는 27일 관리직 남자 사원들에게 강제해산당했다). 동맹파업과 이를 지지하는 농성·시위 과정에서 모두 43명이 구속되고, 연인원 370명이 구류를 살았으며 700여명이 강제로 사표를 쓰거나 해고당했다.

구로지역 민주노조들이 이처럼 과감한 연대투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출범 때부터 목적의식적으로, 또한 일상활동 속에서 구체적으로 연대활동을 해온 경험 때문이다. 동맹파업에 참여한 4개 노조는 모두 84년 6~7월 사이에 결성돼 활동가들간의 소그룹활동, 신규 조합장 모임과 부서별 교류, 대의원대회나 창립기념일 등을 통한 공동행사, 합동 간부교육 등을 통해 연대의식을 강화시켰고, 85년 봄의 임투 과정에서도 긴밀하게 협의하고 협력했다.

그러나 구로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은 동맹파업이라는 투쟁의 형식에서만 새로웠던 것이 아니었다. 파업 현장과 가두시위때 나온 구호들은 비록 초보적인 수준이기는 했지만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정치성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동맹파업으로 해고된 4개 노조 노조원들은 7월23일 가리봉 오거리에서 ‘노동자 연대투쟁 선언-노동운동 말살정책을 분쇄하자’는 선언문을 뿌리며 시위를 벌였는데 그 선언문에서 그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노동자를 영원히 노예로 부리려는 독재정권과는 한치의 타협도 있을 수 없다. …우리는 8백만 노동자가 민주노동운동의 깃발 아래 모이는 그날까지 선봉에 서서 굽힘없이 싸워나갈 것을 선언한다. …노동자를 탄압하는 폭력정권은 물러나라!”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소설가)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문성현 (" 미디어부 기자)

독자제보를 기다립니다경향신문 미디어부(02-3701-1156~8)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02-3709-7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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