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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펀트’

입력 2004.10.07 15:56

주방 냉장실로 피신했다가 알렉스에게 발각된 네이선과 캐리가 마지막 순간에 들었을 총성을 영화는 끝내 들려주지 않는다. 거스 반 산트의 다른 영화 ‘투 다이 포’(1995년)에서 재니스(일레나 더글라스)가 수잔(니콜 키드먼)의 시신이 잠긴 얼음호수 위에서 묘기까지 부려가며 스케이팅을 즐기던 긴 엔딩과 대조되는 이 마지막 장면은 잔인한 여운을 남긴다. 실제에 가까운 총격장면은 직접 총을 쏘아봐야 했던 이 땅의 많은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 모두의 가슴과 등을 때렸으리라. 그때 머릿속에선 거스 반 산트가 ‘굿 윌 헌팅’(1997년)에 삽입했던 ‘Between The Bars’도 겹쳐 흘렀다. 자신의 가슴을 칼로 찔러 세상을 등진 엘리엇 스미스의 노래.

[영화 다시보기]‘엘리펀트’

구스타프 프라이타크는 극작가의 임무를 “사건을 위해 사건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사건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나타내는 것”이라 했다. ‘엘리펀트’는 사건만 다루는 것 같지만 구호 속에 매몰되는 구체적 실재, 즉 한편의 영화 소재가 될 법한 사연들을 지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무게를 둔다. 알렉스와 에릭은 검은 망토를 두르고 거대한 낫을 든 괴물도, 하켄크로이츠(나치의 상징, 갈고리 십자)가 그려진 완장을 찬 광인들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맨 처음 희생되는 학생을 또다른 왕따 미셸로 설정하고, 영문도 모르고 죽어갈 아이들을 소중하게 보여줌으로써 가해자들을 두둔하지도 않는다. 사진에 몰두하는 일라이에게도, 음식 투정이나 늘어놓는 치어리더들에게도 시간과 시선은 공평하다.

시간과 시선, 장소의 문제는 극예술의 오랜 관심사였다. ‘엘리펀트’는 아이들 중심으로 시간을 다시 감고 공간을 겹쳐 찍음으로써 시간과 시선을 동시에 실험했다. 사이 사이에 삽입된 무심한 하늘 풍경은 시간에 관한 단편들로 이루어진 ‘텐 미니츠 트럼펫’(2002년)의 접속화면을 떠올리게 하고, 그중 트레일러에서 10분을 보내는 여배우를 담담하게 바라본 짐 자무쉬의 ‘실내-트레일러-밤’이 여럿 겹쳐진 듯한 인상을 준다. 또 보호와 감금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의미를 갖는 장소로서의 학교를 무대로 제시하고, 살인을 앞둔 알렉스의 손가락으로 ‘월광소나타’와 ‘엘리제를 위하여’가 처연하게 흐르게 했다. 정적이면서도 꿈틀대는 시적 현장감이 달성되는 순간이다.

물론 어느 습한 가을날 가뭇없이 사라진 순간들을 밟아갈 뿐인 ‘엘리펀트’의 거리 두기는 공허할 수도 있다. 사건에만 집중한다면, ‘푸른 수염’을 관람하다 무대로 뛰어올라간 마오리족 전사들이라면 모를까, 이 모든 것이 그저 남의 일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사실, ‘엘리펀트’가 ‘드럭스토어 카우보이’(1989년)나 ‘아이다호’(1991년) 같은 신선함이 되살아난 작품이라곤 하지만, 칸국제영화제의 황금종려상과 감독상을 수상한 것에는 영화 외적인 이유도 작용했으리라는 의구심이 슬그머니 끼여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냥 바라보기’를 권하는 것, 구호에 앞서 눈앞을, 바로 옆을 보라고 권하는 것에는 진정 가치가 있다. 등줄기에 깊게 파이며 그어지는 채찍자국을 무늬로 삼게 될 젊은 영혼들에게 애정을 품어온 거스 반 산트는, 비가 내리는 건 보지 못하고 비 갠 후 흔적만 봐야 하는 이들을 대신하여 한편의 에세이를 썼다. 총에 맞기 직전까지 셔터를 눌렀던 일라이가 어른이 될 수 있었다면 어떤 사진을 찍었을까. 그런 아이들이 성장하여 가꿨을 텃밭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살아남아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의 ‘또 다른 나’, 어디에선가 눈길을 주고받았을 그 사람이 바로 그들이라는 사실. ‘엘리펀트’는 여기에서 다시 출발할 때 구호도 살아있을 수 있음을 침묵으로 말하고 있었다.

〈나도원|웹진 ‘가슴’(gaseum.com)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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