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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천여 ‘식물의 장서’ 돌보며 인생2막

입력 2005.06.19 17:51

평생 한가지 일이라도 반석 위에 올려놓기는 쉽지 않다. 흔히 말하는 외길을 걸어온 지 몇십년… 그렇게 해서 나름대로 인생의 한획을 긋기도 한다. 그럴 경우 우리는 대개 ‘성공한 삶’이라고 한다. 40년 가까이 출판 외길을 걸어온 나춘호 예림당 회장(64)도 여기에 해당한다.

[사람속으로] 3천여 ‘식물의 장서’ 돌보며 인생2막

그 새로운 꿈은 식물원을 만드는 것이었다. 삶을 연극무대에 비유하자면 그는 이제 인생 2막의 무대에 서 있는 셈이다. 인생 1막이 출판인으로서의 삶이었다면 인생 2막은 식물원 원장으로서의 삶이다. 노년에도 청년과 같이 꿈을 잃지 않은 그를 경기 여주군 산북면 앵자봉의 방축골 산자락에 자리잡은 해여림식물원에서 만났다.

2001년 한국 출판인 최초로 국제출판협회 상임이사로 피선, 아시아·태평양출판협회 회장 연임, 1973년 설립한 어린이책 전문 출판사인 예림당을 여지껏 키워오며 중국, 홍콩, 동남아 등지에 저작권을 수출, 국내 도서수출에 새로운 장을 개척한 것 등은 나춘호 회장이 출판인으로서 걸어온 큰 족적이다. 그런 나회장을 만나러 가는 길에 기자는 줄곧 하나의 의문을 품고 있었다. 출판인으로서 누구 못지 않게 성공한 그가, 이제는 좀 쉬어도 될 나이에 왜 식물원 조성이라는 거대한 일을 벌였을까. 새로운 일을 벌이도록 한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일까.

-“어린이 위한 자연학습장 제공”-

식물원, 그의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만난 나회장은 무척 피곤해 보였다. 99년 췌장수술이후 체력이 많이 떨어진 탓인지, 아니면 5만평의 식물원 조성이란 ‘거대한 과업’을 완수하는 데 전력을 다한 탓인지… 나회장을 만났을 때는 식물원을 개원한 지 한달쯤 되는 날이었다. 마치 방금 이사한 집이 채 정리되지 않은 그런 분위기였다. 병치레 이후 좀 마른 얼굴이었지만 땡볕에서 일을 한 탓인지 적당히 구릿빛으로 그은 얼굴엔 노동의 즐거움이 가득했다.

“주변 지인들도 그래요. 이제 좀 쉴 나이에 무슨 외도냐고. 하지만 전 외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출판 사업의 연장이라고 생각해요. 출판사업을 하면서 아쉬웠던 점을 메울 수 있는 것이 바로 식물원이에요. 그리고 쉬는 것, 노는 것은 권태감에 빠질 수가 있어요. 평생 일을 즐기며 살아왔는데 일을 놓을 수가 있나요.”

사실 그렇다. 외도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정작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업적을 이룰 만큼 이뤘고, 그래서 쉴 만한 나이가 되었음에도 꿈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같이 경기가 좋지 않을 때, 특히 생활고에 시달리는 가장의 입장에서 꿈을 가진다는 것은 쉽지 않다. 매일 매일 일상에 매달려 하루를 보내는 것이 보통이다. 꿈을 가진다는 것은 젊은이의 특권이다. 꿈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젊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아직 ‘젊은 청년’이다.

꿈을 가진다는 것에 대해 그는 할말이 많다. “꿈은 언제나 현실보다 높은 곳에 있으므로 이루기가 어렵지만 꿈이 없는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에요. 사는 일이 재미 없고 일할 의욕도 없다면 그건 죽은 삶이나 다름없지요. 즉 꿈을 잃으면 인생을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새벽5시면 전지가위 들고나서-

그가 최근 펴낸 자서전 ‘나의 일 나의 인생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 첫장에서도 꿈을 가진 삶을 강조하고 있다. 그 꿈은 점잖게 말해서 도전의식, 세칭 ‘깡다구’에서 비롯된다. 그의 꿈은 그의 생명을 구하고 식물원을 조성하는 에너지였다.

사람들은 보통 큰 병을 앓게 되면 기가 꺾이게 마련이다. 나회장도 시련기가 없지 않았다. 99년 췌장수술을 받은 후 재수술을 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도 절망과 두려움의 나락에 빠지기도 했다.

“당시 3년 시한부 인생인가 싶었을 땐 정말 분하고 억울해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그러다 문득 나약한 내 모습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병마에 질 수 없다는 오기가 발동했지요.”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그는 새로운 꿈의 씨앗을 마련했다. 그것이 바로 해여림식물원이다. ‘해여림’은 ‘온종일 해가 드는 여주의 아름다운 숲’이란 뜻을 담은 해+여+림의 합성어다. 개원한 지 한달 되었지만 이미 3,000여종의 식물이 장서(藏書)처럼 정리되어 있다. 그는 이 거대한 ‘식물도서관’을 어린이 천국으로 만들고 싶다고 했다. 여기에 청소년 수련관, 천문관측대 등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평생 어린이 책을 팔아온 만큼 어린이들을 위한 일을 해야겠다는 것이다.

-“꿈을 잃으면 인생을 잃는것”-

40년 가까이 출판사업을 해온 그가 식물원을 조성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십수년전, 어린이들을 위한 식물도감을 펴내기 위해 이것저것 자료를 모으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갈수록 사라지는 우리 자생식물이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게다가 외국에서 식물자원에 대한 유전자 확보를 위해 우리나라 자생식물을 무차별 수집해 간다는 데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출판에 필요한 자료 확보도 하고 소중한 우리 자생식물을 한데 모아 기르면서 살펴볼 수 있는 체험학습적인 식물원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식물원을 만들고 싶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아버지를 기리고 싶은 마음에서였다고 나회장은 고백했다. 그의 부친은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읍의 산자락에 수천평의 땅을 일구었으나 가족들은 그 땅을 지키지 못했다고 한다. 훗날 나회장은 그 땅을 되찾으려고 했으나 주변환경이 너무 바뀌어 찾지 못했는데 그 아쉬움을 대신해 식물원을 만들게 됐다고 한다.

그는 해외에 나갈 때마다 식물원을 찾아보았다. 각 나라별 특징도 파악하며 나름대로 특색을 지닌 식물원을 만들 생각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독일의 베를린식물원은 그 역사가 100년이 넘어요. 대개가 관람 위주의 식물원이지만 베를린식물원은 학술적인 체계를 강조한 탓에 전문가들이 많이 찾아요. 일본의 식물원들은 깔끔하게 정리가 잘 된 게 특징이죠.”

한국의 식물원은 그 역사가 일천하다. 그는 자신의 식물원을 학술적인 성격과 관람의 성격을 병행시킨, 식물원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보겠다는 의욕을 보였다.

나회장은 요즘도 새벽 5시면 일어나 전지가위를 들고 식물원을 둘러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2시간 동안 나무들을 살펴보며 다듬고 하다보면 나무와 한몸이 되는 듯하다고 한다.

“식물을 대할 땐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식물은 단시일에 완성되는 게 아니라 일정한 세월을 기다려야 제 모습을 보입니다. 도(道)를 닦으며 선(禪)을 찾는다고 하지만 자연 속 식물을 다듬으면서도 선을 느낄 수가 있어요. 식물들을 사랑으로 대하니 화답하듯 잘 자라요.”

96년 대한출판협회 회장에 선임된 이후 2002년 2월까지 6년동안이나 회장을 맡았던 그는 회장직에 있을 때만해도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러나 회장직을 그만두자마자 본격적으로 식물원 조성에 나섰다.

앞으로 식물원 다듬는 데 전념할 것이냐고 물었더니 여전히 출판인으로서의 길도 걸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출판과 식물원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고 공존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책이 활자의 집합체이자 사상을 담은 그릇이라면 식물원은 각종 꽃과 나무의 집합체이자 자연을 담은 그릇이다. 활자들의 숲인 책을 만들어온 나회장은 장서 모으듯 꽃과 나무들을 모아 식물들의 거대한 책꽂이를 만들었다. 그 자양분은 그가 노년에도 잃지 않은 꿈이었다.

〈인터뷰/이동형 여론독자부장 s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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