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 아시아 최초, 세계 여덟번째로 히말라야 8,000m급 14개 봉우리(14좌)를 모두 오른 신화적인 산악인 엄홍길(45·트렉스타 기술이사). 만년설빙과 칼바람, 희박한 공기 속에서 ‘온몸으로 온몸을 극단까지 밀고간’ 사나이. 그는 이제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인다. 기업체나 학교에서는 그를 강사로 초청해 히말라야 등정의 실감나는 도전기를 듣기 원한다. 극심한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포기와 실패를 모르고 끝내 정상을 밟고야마는 도전정신에 대해 누가 그보다 더 잘 말할 수 있을까. 그가 올해들어 또 두차례 히말라야에 다녀왔다. 그러나 올해의 히말라야행은 정상 등정이 목표가 아니었다.
![[사람속으로] 엄홍길, 올 두차례 히말라야行 휴먼드라마](https://img.khan.co.kr/news/2005/07/03/5g0414a.jpg)
-16좌 완등후엔 기록도전 그만-
사실 절친한 산 후배 박씨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엄홍길은 벌써 또다른 히말라야 등정 기록에 도전했을 터였다. 그는 2000년 7월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뒤 지난해 얄룽캉(8,505m, 세계 4위봉) 등정에 성공했고, 올해 봄 로체샤르(8,400m, 세계 7위봉) 등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두개의 봉우리는 그동안 위성봉으로 취급받아 왔지만 그 높이와 등반 상징성으로 점차 독립봉으로 인정받는 추세다. 산악인들 사이에 히말라야 8,000m 고봉에 포함시켜 16좌로 해야 한다는 논의가 힘을 얻고 있다. 엄홍길은 세계 초유의 16좌 완등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계획을 모두 미루고 휴먼원정대를 꾸렸다. 그는 박무택씨와 히말라야의 ‘안자일렌’(자일로 서로의 몸을 잡아매고 빙벽을 타는 행위)처럼 생사를 넘어선 연대의식으로 묶여 있다고 믿는다. 두 사람은 칸첸중가, K2, 시샤팡마, 에베레스트 등 4차례의 히말라야 원정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했다. 2000년 칸첸중가 원정 때는 8,500m의 설사면에서 산소통 없이 무려 10여시간 동안 체감온도 영하 30도의 추위와 사투를 벌이며 비박(야외에서 노숙하는 것)을 했다. 베이스캠프에서조차 희망을 버렸지만 두 사람은 결국 다음날 아침 정상을 밟은 뒤 살아서 돌아왔다.
엄홍길은 도봉산 자락에 살면서 ‘산’을 처음 만났다. 지금까지 20여년을 히말라야 고산준령을 찾아다녔다. 엄홍길의 14좌 완등, 그 영광의 기록 뒤에는 꼭 14번의 실패가 있었다.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을 따지자면 셀 수도 없다. 그리고 함께 한 등반길에서 박병태, 지현옥, 한도규, 박주훈, 황선덕, 현명근씨, 그리고 셰르파인 술딤 도로지, 나티, 카미 도루지, 다와 타망 등 10명의 동료를 잃었다. 박무택씨처럼 따로 등반길에 나섰다가 희생된 동료들도 많다.
-세계 산악인 시신수습 나설것-
박무택씨는 사고를 당하기 전 엄홍길과 로체샤르 등정을 함께 해 16좌의 대미를 장식하기로 약속한 사이였다. 엄홍길은 내년 봄 로체샤르 등정길에 박씨의 사진을 가져가 정상에 묻는 것으로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다.
엄홍길은 산의 힘은 경건성의 힘이자 순결성의 힘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산을 오르는 것은 물질의 세계에서 정신의 세계로 옮겨가는 과정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그는 정상에 선 순간보다 정상을 눈앞에 두고 산행을 단념해야 할 때 대자연의 위대함과 그 속에 깃든 신의 존재를 더 많이 느낀다고 말했다. 산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정신과 육체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산이 그의 마음을 받아줬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오직 운이 좋았기에 다른 친구들보다 오래 살아남았습니다. 히말라야에 가면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산 동지들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힘과 용기를 얻기도 합니다. 산에서도 인생에서도 그들이 나의 보호자이자 안내자입니다.”
그는 붉어진 눈자위를 훔치며 술을 들이켰다. 요즘 그는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도 말수가 부쩍 줄었다. 경건함 같은 분위기도 온몸에서 묻어난다. 때로는 너그럽게, 때로는 가혹하게 삶과 세상을 가르쳐준 산을 자신의 전생이라 굳게 믿는다는 엄홍길. 그가 꿈꾸는 미래는 무엇일까. 그는 후인들이 오를 큰 산 하나를 남기는 생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스스로 ‘인간사랑의 산’ ‘희망의 산’이 되고 싶다고.
“휴먼원정대와 희망원정대를 이끌면서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무택이는 사람들이 지나치는 등반로상에 노출돼 있는 전 세계 산악인들의 시신을 수습해달라고 원하는 것 같았습니다. 히말라야의 정상 근처에 방치된 시신만도 200~300여구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번 원정에서도 5구의 시신을 확인했습니다. 산자락에 방치된 조난자들의 영혼을 편히 쉬게 해주고 유해나 유품을 가족에게 전해주고 싶어요.”
그는 지난달 24일 서울 홍대앞의 한 음식점에서 있었던 저녁모임에 참석했다. 올해초 엄홍길을 따라 히말라야 희망원정대에 참가했던 장애인과 그들의 멘토(후원자) 등 20여명이 자리를 함께 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조를 이뤄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3,193m 지점에 위치한 푼힐전망대를 등정했던 사람들이다. 당시 엄홍길 대장의 지휘로 히말라야 설산에 올랐던 장애인들은 이제 예전의 장애인들이 아니다.
휠체어 육상선수인 박정호씨(32)는 희망원정대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히말라야 8,000m 고지 핸드워킹 도전을 계획하고 있다. 언어장애·사지장애가 있는 신선해씨(25)는 이날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르고 멘토와 함께 블루스를 추기도 했다. 정신지체 3급인 김민수씨(28)는 혼자 택시를 타고 모임에 나왔다. 이들은 신체적 장애가 결코 인간의 희망을 꺾을 수 없다는 산의 가르침을 이어가고 있다. 엄홍길은 제2차 희망원정대도 이끌기로 약속했다.
그가 히말라야 8,000m봉 14좌를 완등한 지도 벌써 5년이 지났다. 이제는 정상 공격조보다는 베이스캠프에서 등반을 지휘할 나이. 아직 경험이나 체력, 정신력에 자신이 있지만 그래도 내년 봄 16좌를 완등한 다음에는 높이 위주의 기록 등정은 그만두기로 했다.
-삶에 용기주는 ‘희망의 산’ 되고파-
엄홍길은 이제 제2의 산악 인생을 살아가고자 한다. 그는 마흔이 넘어 한국외국어대 중국어과에 진학해 지금 4학년이다. 대학 졸업 후에는 자연탐험학교를 열 생각이다. 또 셰르파나 산악인, 그리고 등반 중 목숨을 잃은 산악인 가족 중 생활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에도 나설 계획이다.
“산은 이 세상에 소중하지 않은 인생은 없다는 것, 우리에게 절대 극복할 수 없는 실패나 장애란 없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히말라야가 장애인들을 변화시킨 것처럼 산은 세상에 좌절하고 포기하려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위대한 존재입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도전정신을 심어주는 일이 내가 할 일이지요.”
이제 엄홍길이 오를 만한 높은 산은 지상에 없다. 그래서 그는 요즘 ‘세상의 산’으로 하산 중이다. 그는 산과 자연에서 배운 것을 세상에 전하는 ‘산의 전도사’가 될 셈인 것 같다. ‘히말라야의 탱크’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왜소한 체구(키 167㎝, 몸무게 66㎏)와 선한 눈빛, 순박한 표정과 달리 그의 마음속에 히말라야의 장엄한 연봉들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일까.
〈김석종 문화부장·사진|김영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