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에 축구 국가대표선수를 지낸 황재만 휠체어럭비협회장이 14일 서울 문래동 집에서 럭비 보급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우철훈기자
손으로 럭비공을 던졌다. 혼신의 힘이었다. 그러나 3~4m가 고작이다. 얼굴은 이내 진땀으로 뒤범벅된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은 환하다.
한때 그가 운동장에서 스로인하면 공은 골문 앞을 향해 30m는 훌쩍 날았다. 상대팀 수비수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이제 그에게서 옛 모습을 찾아내기란 힘들다. 그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다리가 아니라 휠체어다. 그나마 다리는 자꾸 마비돼 손으로 연방 주물러야 한다.
그런 그가 다시 롱스로인에 나섰다. 옛날엔 상대 골문이었지만, 이제는 장애인 재활이라는 멀고 먼 목표를 향해 던진다는 게 다를 뿐이다.
-86년 척수염진단 투병생활-
그는 한국휠체어럭비협회 회장인 황재만씨(54)다. 1970년대를 풍미한 축구 국가대표선수인 그는 골을 넣는 풀백이자, 롱스로인의 대명사였다. 그의 손을 떠난 축구공은 상대 진영 깊숙이 포진한 장신 김재한 선수의 머리에, 차범근 선수의 다리에 어김없이 떨어졌다. 그는 2003년 축구전문지 ‘베스트 일레븐’이 뽑은 시대별 베스트11에서도 김재한, 차범근, 이영무, 이차만, 김호곤 등과 함께 70년대를 대표하는 선수로 선정됐다.
“따로 훈련하거나 배운 것은 없어요. 중동고 3학년 때인데 호주 대표팀과 우리나라 청룡팀 간의 경기에서 호주 선수가 바로 골문 앞을 향해 던지더라구요. 그래서 나도 한번 해봐야겠다고 마음 먹고는 시합 때 써먹었더니 멀리 나가데요. 그 뒤로 상대 진영의 드로잉은 다 제몫이었지요.”
76년 도쿄에서 열린 한·일 축구 정기전에서 헤딩으로 결승골을 뽑은 것을 가장 자랑스러운 순간으로 기억하는 그가 투병생활에 들어간 것은 80년대 후반. 86년 멕시코월드컵 때 할렐루야 축구단을 이끌고 멕시코를 다녀온 뒤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열병이었다. 다리의 힘이 빠지고 쉽게 지쳤다. 처음엔 운동의 후유증이려니 했다. 하지만 갈수록 심해졌다. 결국 척수염 진단이 나왔다. 길고 긴 투병생활이 시작됐다. 할렐루야축구팀 감독도 그만뒀다. 일본 가고시마까지 가서 치료를 받았지만 “현재 치료제를 개발 중”이라는 말만 들은 채 귀국했다. 약은 아직도 개발이 끝나지 않았다.
그는 휠체어를 싫어했다. 아시아의 철벽수비수로서 자존심이 상했다. 반드시 제 다리로 걸을 수 있다고 믿었다. “휠체어에 앉으면 다시는 혼자 걸을 수 없다는 불안이 짓눌렀어요. 그러려면 차라리 삶을 포기하자는 생각도 들었죠. 아내의 설득과 신앙으로 겨우 현실을 인정하자고 마음을 다잡았어요.”
-경추환자 도우려 보급나서-
‘새로운 기회’는 10여년 만에 사경에서 찾아왔다. 93년부터 휠체어를 탄 지 10년 만이었다. 척수신경마비에다 기관지확장, 골다공증 등이 겹쳤다. 제대로 소화를 시키지 못해 영양실조까지 걸리고 치아가 몽땅 무너져 내렸다. 72㎏이던 뭄무게는 45㎏까지 떨어졌다. 입원해 겨우 수혈로 숨을 돌리던 때였다. 병을 앓으면서 병치레하느라, 다른 사람에게 부담이 될까봐 축구장을 가는 것은커녕 외출도 꺼린 그였다.
“아내에게 ‘내년까지나 살 수 있겠나’라고 말할 지경인데 윤세완씨라는 분이 병원까지 찾아왔어요. 휠체어럭비를 보급하려는데 앞장서 달라고 하더군요. 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처지에 어떻게 해요. 당연히 거절했죠.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찾아오는 걸 그대로 내치기가 뭐해서 ‘몸이 좀 나아지면 생각해보자’고 말한 게 계기가 됐어요.”
-비싼 전용휠체어 마련 애로-
아내 유선경씨의 격려가 힘이 됐다. “남편 뒷바라지하는 일만도 벅찬데 아이들을 어떻게 보살펴요? 둘째 대균이만 해도 남편 동창을 비롯해 주위 분들의 도움으로 축구선수로 컸어요.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보람있는 일을 해보자. 그러면 도와준 분들에게도 보답이 되리라 여겼지요.”
부부는 이내 휠체어럭비의 전도사가 됐다. 가까운 이들부터 권했다. 하지만 국내 장애인들은 휠체어농구나 탁구는 알아도 럭비는 몰랐다. 게다가 목 부위의 신경을 다친 경추환자는 하반신은 물론 상반신까지 마비돼 집에서 누워지내기 일쑤였다. 그들 생각에 럭비는 땀과 흙을 뒤집어쓴 채 온 몸으로 부딪치는 스포츠였다. 대개 상상이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누구도 선뜻 용기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윤씨가 그에게 매달렸듯이 장애인들을 설득했다. 하나 둘 체육관으로 불러냈다.
그도 휠체어를 탄 채 체육관에서 젊은 장애인들과 온 몸으로 부딪쳤다. 판판이 나가떨어졌지만 몸에 힘이 붙었다. 잦은 외출과 사회활동은 그에게 활력을 불어넣었다. “전성기 때보다야 못하지만 저를 자주 보는 사람들은 요즘 얼굴이 좋아졌다고 해요. 제 체중이 이제 52~53㎏은 나가요. 봉사하는 게 아니라 되레 제가 힘을 얻고 있는 셈이지요.”
처음엔 운동장소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 겨우 서울 송파구 오금동의 곰두리체육관을 빌려 싹을 틔웠다. 하지만 이제는 1주일에 4곳이나 가야 한다. 서울 수유동 국립재활원에서 환자의 재활을 위해 휠체어럭비를 찾는 등 서서히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쑥스럽지만 제 이름을 내걸고 회장배 대회도 열었어요. 선수들에게 재활과 운동에 대한 도전의식을 심어주려고 용기를 냈지요.”
럭비를 통해 장애인 선수들도 활기를 되찾았다. 언제나 부인이 밀어주는 휠체어를 탄 채 나들이하던 한 선수는 최근 영화관에 갔다. 당연히 부인이 자동차에 태워, 휠체어를 밀어서 갔다. 부인은 일 때문에 먼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영화가 끝날 시간이 됐는데도 “데리러 오라”는 연락이 없었다. 휴대전화도 받지 않았다. 가족들이 발을 동동 구른 지 2시간쯤 지나서야 그가 땀으로 목욕한 채 집으로 들어섰다. 럭비를 하면서 팔에 힘이 오르자, 휠체어의 바퀴를 스스로 밀면서 2㎞를 달려온 것이다. ‘혼자 해보자’며 휴대전화도 끊은 채. 그날 온 가족이 부둥켜 안고 울었다.
“경추 환자는 다른 척수신경마비와는 달리 제대로 운동하지 않으면 손발 마비가 심해지고 말하고 숨쉬기도 어려워져요. 게다가 요즘 교통사고로 목을 다치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 보급이 시급해요.”
가장 큰 어려움은 럭비용 휠체어가 대당 5백만원이 넘는다는 것이다. 럭비처럼 휠체어끼리 자주 부딪쳐야 해 엔간히 튼튼해선 안된다. 아직까지 외국에서 수입한다. 현재는 선수들도 농구용 휠체어로 대신하고 있다. 하지만 정식으로 장애인 스포츠단체로 등록되지 않은 데다 널리 알려지지 않아 도움을 받기가 만만치 않다. 현재까지 그의 고교나 대학 동문들의 십시일반으로 연습하고 있지만 휠체어까지 마련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北京올림픽 정상에 서 봤으면”-
“아시안게임이나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올려야 합니다. 성적 자체가 목표는 아니지만 메달을 따야 다른 장애인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겠어요. 어떻게든 럭비용 휠체어를 마련해 베이징올림픽에 나가는 게 가장 큰 소망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축구를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다. 그는 현재 기수 대항 축구시합에 참가하는 중동고 64회 축구팀 감독이다. 둘째 대균이도 아버지를 따라 중동중과 중동고를 거쳐 고려대 축구선수로 뛰고 있다.
◇휠체어럭비란=목 부위의 신경이 마비된 경추환자들을 위해 개발된 장애인 스포츠다. 농구장 크기의 코트에서 8분씩 4쿼터로 경기를 치른다. 4인제로 드리블도 가능하며 주로 패스를 통해 상대 진영을 공략한다. 공을 쥔 선수의 휠체어가 엔드라인을 통과하면 점수를 준다. 목의 신경이 마비돼 손발은 물론 목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경추마비 환자들을 위해 슛을 하려면 고개를 쳐들어야 하는 농구를 대신해 개발됐다. 시드니 장애인올림픽부터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인터뷰/김윤순 기획취재부장 ky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