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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빈 전 광복회장 “親日덮고 가면 이나라 바로 못서”

입력 2005.09.04 17:54

[사람속으로] 윤경빈 전 광복회장 “親日덮고 가면 이나라 바로 못서”

광복 60주년. 인생으로 치면 한 갑자(甲子)를 지난 셈이다. 인생 60년이면 모든 시행착오를 겪고 그 경험으로 하나의 삶의 정형을 완성하는 시기다. 그러나 이 나라의 광복은 아직도 미완(未完)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그 근거를 대는 데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친일’을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부끄러운 민족적 과제를 풀지 못한 채 광복군 창설 65주년을 맞았다. 광복군…. 국운이 기울 대로 기울어 쇠락을 거듭하는 조국을 지켜내고자 광야에 섰던 지사(志士)들…. 광복군 창설 65주년을 맞은 오늘날, 그 기개는 제대로 전해지지 못했고 그들의 활동상은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광복군에 대한 예우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당리당략과 투기만 좇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바라보면 참담하기만 하다. 그런 부끄러움을 안고 ‘광복군의 막내’ 윤경빈 전 광복회장(86)을 만나러 갔다.

지난달 29일, 경술 국치일이기도 했던 그날,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 친일인명사전 수록인물 1차 명단 3,090명을 발표했다.

이 보도를 접하고 가장 감회가 깊었을 인물 중 한명이 바로 윤경빈 전 광복회장이었으리라. 1999년 1월, 그가 광복회장을 맡으면서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이 ‘친일 청산’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재임기간 동안 각종 친일 관련 자료를 모아 2002년 3·1절을 하루 앞둔 날, 이완용 등 692명의 친일파 명단을 발표했다. 당시에도 그는 당당하게 명단 발표의 일성(一聲)을 울렸다.

“친일파 문제를 덮어둔다면 또 다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누가 독립운동을 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는가.”

지극히 당연한 이 말이 새삼스레 들리는 이유는 뭘까. 당연한 과제를 제대로 하지 못한 탓이 아닐까. 윤전회장은 평소에도 이를 강조해 왔다. “친일청산을 확실히 하는 길은 친일명단을 밝히고 이를 역사에 남기는 것이다. 그래야 남북이 통일됐을 때 할 말이 있지 않겠는가.”

-명단발표, 역사적 청산 시작일뿐-

이 역시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광복 60년을 맞은 오늘날에도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건가. 이런 말들이 나오는 한 광복은 ‘절반의 회복’에 불과하고 친일청산은 끝나지 않은 항일전쟁에 다름아니다. 그에게 친일명단 3,090명 발표를 본 소감을 물었다. 그는 지금도 마찬가지 입장이라고 강조했다.

“2002년 당시 명단을 발표하고 이어 국회 민족정기모임에서도 방응모, 김성수 등 16명을 추가해 명단을 발표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명단 발표가 다는 아니에요. 그건 완성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지요. 이를 국회에서 검증하고 통과시켜 ‘역사적 사실’로 굳혀야 제대로 청산이 되는 거지요. 그때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고 흐지부지되고 말았으니 완전한 친일청산은 안된 셈이지요.”

윤전회장은 친일청산이 꼭 친일인사의 죄를 밝히고 처벌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단지 역사적으로 분명히 밝히고 넘어가자는 것이다. 그는 이번 발표를 보면서도 못내 미덥지 못한 구석이 있는 듯했다.

“이번에 국회 과거사청산법이 상정되겠죠. 친일파 청산을 포함하는 그 법이 통과돼 국회에서도 조사하고 최종판을 국회에서 확인해야 마침내 역사적 청산이 되는 거예요. 아직은 친일파 청산이 다 된 거 아니에요.”

그는 친일명단과 관련, 분열상을 보여서는 안된다며 일부의 반목을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한발 물러서는 것인가 했더니 그건 아니었다. 노인의 마음 속에는 이런 친일청산이 민족 모두의 공감을 얻고 우리 민족의 단결의 계기가 되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단죄가 단죄로써 끝나지 않고 민족 단결의 에너지로 승화하는 것을 바라는 심정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노인의 걱정’을 숨기지 않았다. 노파심이라고 했던가. 민족반역의 범위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그 개체수는 엄청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있는데 한편으로는 해방후 세월이 너무 흘러 친일파의 죄상이 희석되기도 하고 그 증거가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친일문제는 이쯤에서 접고 그에게 올해가 광복군 창설 65주년이라고 했다. 윤경빈 전 회장은 “1940년 9월17일이 창설일이지요” 하고 되받았다. 할말이 많은 듯 얼굴이 붉게 상기되기 시작했다.

“광복군의 역사가 해방될 때까지 4년반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에요.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 이전에도 광복군의 정신과 기개는 이어져 있어요. 연해주 독립군, 만주 독립군이 다 주요 간부로 있었어요.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은 청산리전투에서 활약했던 분이죠. 독립군이 광복군되고 나중에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되잖아요.”

-광복군 정신 임시정부와 이어져-

윤전회장은 광복군의 막내 세대다. 1944년 입대에 1년6개월 정도 투쟁했다. 그러나 전쟁을 경험해 본 세대와 경험하지 못한 세대의 차이가 엄청나게 크듯이 독립활동에 직접 참여한 세대로서 그의 행보와 증언은 다음 세대들에게 소중하다.

평남 중화(中和) 출신인 윤전회장은 평양 주변의 수재들만 간다는 평양고보를 다녔다. 당시만 해도 부잣집 아들로 아쉬운 것 없이 자랐다. 평양고보 시절 스피드스케이팅 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던 그는 요즘도 그 체력으로 버틴다며 모처럼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후 일본 메이지(明治)대학으로 유학, 법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역사의 수레바퀴는 탄탄대로만 달리지 않았다. 전선(戰線)을 확대한 일본은 그를 학병으로 징병, 중국의 전쟁터로 내몰았다. 중국 쉬저우(徐州)에서 5개월 만에 탈출, 광복군에 입대했다. 그 당시 장준하, 김준엽 등과 같은 부대에 있다가 탈출도 함께 했다. 광복군 총사령부에 소속된 그는 부관으로 복무하다 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의 경위대장을 맡았다. 이 인연으로 그는 백범시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며 백범기념관 건립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어떤 이는 그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사돈(김홍일 의원이 사위)이어서 그 배경으로 광복회장이 되었다고 폄하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는 광복회장으로서 과거 어느 누구보다 활발한 행보를 보였다. 친일청산 목소리를 높이며 친일명단을 처음 만든 이도 바로 그였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해방후 친일파가 계속해서 정국의 주도권을 쥐는 바람에 친일청산의 기회를 잃은 것이 계속 이어져 와 선배들이 친일청산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는 광복회장으로서 굵직굵직한 일을 많이 해냈다.

러시아 크라스키노 안중근 동맹단지 표석도 그의 재임시절 세웠으며, 청산리 항일대첩 기념비 등 해외 독립유적 사적지 표석설치도 그가 광복회장으로 있을 때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99년 연해주지역 항일독립운동전적조사단장으로 활동할 때에는 1919년 3월17일 대한국민의회가 배포한 ‘션언셔’ 한글판을 입수, 공개하기도 했다. 당시만해도 독립기념관에는 한문본과 러시아어판만 소장돼 있을 뿐이었다.

-일제총칼 맞선 무명용사 恨 풀어줘야-

그가 광복회장으로 재임 당시 가장 보람을 느낀 일은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임정묘역에 ‘대한독립군 무명용사 위령탑’을 건립한 것. 처음엔 국방부에서 거부해 1년여 ‘투쟁’ 끝에 2002년 5월17일 제막식을 가졌다.

“조국을 되찾고자 만주에서, 연해주에서 일제의 총칼에 맞서 싸우던 이름없는 무명 용사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들의 한을 풀어줘야지요. 친일청산을 확실히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챙기는 것도 국가적 과제 아닙니까.”

돌아오는 길에도 귀에 울리는 말이 있었다. “(친일파 문제를 덮어둔다면, 독립유공자에 무관심하다면) 또 다시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누가 독립운동을 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는가.”

〈이동형 여론독자부장 spar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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