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재에서 자신의 분신들을 꺼내보는 월산 임동권 박사. <사진=박재찬기자>
이 땅이 고단하다. 세월이 부산할수록 시대를 꾸짖는 ‘어르신’이 그립다. 닷새 후면 추석인데 마음들이 풍요롭지 못하다. 청명한 가을날 어르신이 들려주시는 추석 정담에 귓가를 적시고 싶다. 추석 향기에 심신을 다독이고 싶다. 한국 민속학의 개척자 월산(月山) 임동권 박사(79·중앙대 명예교수)는 “민족의 정신적 구심점이 와해되고 있다. 한국의 얼이 사라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민요채집에 한평생…민속학 집대성-
노학자는 바람부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요즘 세태를 마냥 안타까워했다. 민족의 장래와 전통 문화가 자취를 감출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추석은 중국에서 유래된 풍습이 아닙니다. 선사시대부터 우리 고유의 명절이죠. 우리 나라와 같은 위도에 위치하는 국가들은 좋은 기후 속에서 만곡(萬곡)을 거두어들인 기쁨을 춤과 노래로 풀고, 조상의 은혜에 감사하는 세시풍속을 이어왔습니다. 먹을거리가 넉넉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추석만큼만’이란 말도 나왔죠.”
임박사는 일제 강점으로 사라진 음력 1월1일 ‘구정’이 1985년 ‘민속의 날’로 부활되고, 90년 ‘설날’로 지정된 배경의 주인공이다. 해방후 민속학 1세대로 활동해 온 그는 민속학을 학술적으로 집대성한 선구자다. 특히 민요부문에선 독보적인 존재. 55년 동안 2만5천수의 민요를 채집했고 2만장의 관련사진을 촬영했다. 61년부터 93년까지 33년에 걸쳐 ‘한국민요집’ 전7권 완성의 과업을 이뤘다. 68년에 한국민속학회를 발족시켰고, 89년 한국민요학회를 창립해 수천년 동안 각 지방에서 구전돼 온 민요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했다.
“민요는 서민의 시각에서 생성된 노래이고 민족의 심성이 배어있는 음악입니다. 구절마다 삶의 지혜가 가득하죠. 민요 ‘아리랑’은 누구나 부르잖아요. 애국가를 잘 못불러도 누구나 애국가를 부르는 것처럼 말이죠.”
-고유의 추석정신 모르는 사람 많아-
이번에 제16회 후쿠오카 아시아문화상 대상을 타는 이유도 민요를 통해 한국민속학을 체계화했기 때문이다. 55년 동안 총 46권의 책을 집필했는데, 독일에서 1권, 일본에서 5권의 책이 번역됐다. 특히 일본에서 외국학자의 저서가 5권이나 번역된 예는 월산이 유일하다고 한다.
“상에 눈이 멀었나 봅니다. 사실 독도문제와 일본교과서 왜곡문제가 있어 상받기 망설여졌습니다.” 후쿠오카는 대륙문화를 받아들이는 일본 최초의 지역이기에 상의 의미가 각별하다. 주최측에선 ‘동아시아 민속학계의 제1인자’라 평하며 ‘한국민속학에서 아시아를 바라보는 석학’이라고 시상배경을 발표했다.
재미작가 백남준, 영화감독 임권택 등이 이 상을 받았는데, 한국 민속학계에선 최초의 수상자다. 그중에도 한국인이 대상을 받기는 세번째.
오는 15일 일본 시상식 참가 후 한·일 민속학 비교연구 세미나를 갖고 일본 시오바라 초등학교 학생들을 상대로 강연도 한다. 18일 귀국하면 월산의 사비로 운영되는 제3회 월산민속학술상 시상식(10월21일)이 기다리고 있다.
“대륙문화는 한국에서 일본으로 물 흐르듯 자연스레 흘러갔습니다. 한·일관계가 희망적으로 발전하려면 양국간에 편견없는 역사연구가 선행돼야 하는데….”
-대학 최초 강의·사진과 개설 선구자-
임동권 박사는 51년 국학대 졸업 후 곧바로 국학대 강단에 선 후 55년 동안 강의해왔다. 찬찬한 어투에 우스갯소리의 화술, 특히 54년 국내대학 최초로 민속학 강의를 시작한 후 차분하고 구수한 입담에 수강생들이 자꾸만 늘어났다.
달변은 취재진의 귀도 솔깃하게 만든다. 월산은 사진기자에게 묻는다. “중앙대 사진학과 출신입니까? 사진학과는 중앙대에 처음 신설됐죠.”
그는 61년 국내 최초의 예술대학인 서라벌 예대를 세운 주역이다. 개교부터 72년까지 예대학장으로 활동하며 사진학과, 방송학과, 연극과, 문예창작과 등을 세운 한국 예술교육의 선구자이다.
“사진학과 개설을 위해 문교부 장관을 만났습니다. 문교부에선 ‘사진 찍어 네모난 종이에 인화하면 되는데 무슨 사진과가 필요하냐’고 되묻더군요. “‘사진은 광학예술이다. 인공위성에서 찍은 사진을 통해 차량 번호판까지 볼 수 있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없었죠. 결국 일본, 필리핀, 독일 대학의 사진학과를 설명하고, 마라토너 손기정 선수의 시상식 사진을 찍은 일본기자의 자료를 제출한 후 63년 사진학과가 태어났습니다.”
‘그까이꺼, 뭐 대~충’ 셔터나 누르고… 식의 행정관료들을 설득한 어르신의 극성(?)이 아름답다.
월산이 사진에 빠진 건 중학교 2학년때. ‘있는 집’의 셋째 아들이었다. 집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서 영상매력에 이끌렸다. 민속학을 접하고는 더더욱 사진이 절실했다. 학문적 지식은 글보다 시각적 자료를 통해 이해력이 배가됐다.
어르신의 아파트엔 서재가 3개인데 방마다 책과 사진으로 가득하다. 부근 오피스텔의 연구실 책까지 합하면 약 2만권. 누군가 월산 문고를 만들겠다면 기증하겠다고 했다.
-“단서 하나로 어마어마한 옛날 부활”-
“이 책들이 내가 섭취할 영양분을 몽땅 빼앗아 갔어요. 허허….” 민속학을 우리 민족의 얼로 다져온 그는 90년대까지 한 달에 대여섯 군데의 월간지에 재미있는 민속학 이야기를 풀어갔다. 당시 잡지명, 외고 제목, 원고료가 빽빽히 적힌 비자금(?) 공책이 노학자의 화려한 시절을 말해준다.
“평일엔 강단에 서고 주말엔 민요 채집을 다녔죠. 원고료로 아내 몰래 비자금을 만들어 답사 가느라 가족과 즐긴 적이 별로 없어요. 요즘은 아내에게 그 빚을 갚으려 하지만….”
50년대까지 민요 채집은 필기로 이뤄졌다. 시골 노인들에게 민요를 청하고 받아적다보면 글 속도가 소리를 따르지 못하기 일쑤. “할머니, 잠깐만”하고 기록한 후 다시 민요를 청하면 김이 빠졌다.
56년 제주도 민요 채집때는 3대밖에 없던 KBS 녹음기 중 한 대를 어렵사리 빌렸다. 녹음기 덩치가 어찌나 컸던지 택시기사와 함께 택시에 들어올렸던 기억이 새롭다.
“길이 좁아 차로 녹음기를 옮길 수 없는 경우 노인들을 서귀포 여관에 모셔놓고 민요를 녹음했죠. 그런데 노인들이 녹음테이프 돌아가는 걸 보느라 노래를 부르다 마는 거예요. 결국 녹음기를 보자기로 덮고 녹음했죠. 참 옛날 이야기네요.”
57년에는 서울 명동에서 기쁜소리사를 운영하는 제자에게 부탁해 일본 도시바 휴대용 녹음기를 구입했다. 그때부터 민요 채집은 더욱 왕성하게 이뤄졌다. 그만큼 부인 이정원 여사(77)의 외로움은 더했을 터이다. 그때 어머니의 위로가 됐던 4남매 중 막내 임장혁 교수(48·중앙대 민속학과)가 부친의 뒤를 잇고 있다.
노학자는 강조한다. 민속학자는 자그마한 단서 하나를 통해 어마어마하게 펼쳐지는 역사를 해석해야 하기에 상상력이 풍부하고 추리도 정확해야 한다고.
노학자는 호기심 많고 꿈 많은 시절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전국의 방언을 채집하는 스승(고 방종현 국학대·서울대 교수)의 가방 들어주는 심부름꾼을 하다, 남이 가지 않은 길을 택하라는 스승의 권유로 민요 채집을 시작했다.
그리고 55년 동안 기록되지 않은 조상들의 모습을 추리해왔다. 이번 추석엔 한국과 일본의 바다를 건너며 또 다른 ‘옛날’을 추적할 것이다. 역사가 흐르고 있다.
〈인터뷰/유인화 레이디경향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