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색깔과 향기가 있다. 한국영화 역대 4위의 흥행성적을 기록하고 있는 영화 ‘웰컴 투 동막골’. 영화를 만든 감독은 나비처럼 가벼운 영혼의 소유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유월 어느날 바람에 실려온 아카시아 향기도 느껴졌다. 눙치고 빠지는 솜씨가 무림고수 뺨쳤다. 관객들을 금세 여름날 저녁 모깃불 피어오르는 동막골 주민으로 만드는 친화력이 느껴졌다. 게서, “근데 있자너, 쟈들하고 친구냐”라고 묻는 여일(강혜정)의 매력에 빠져들고, 수류탄에 튀겨져 하늘을 뒤덮는 옥수수의 고소한 맛에 취한다. ‘한국형 판타지’로 정의되는 이 영화에 벌써 관객 7백여만명이 다녀갔다. 하여, 이 영화를 만든 사내가 우직하고 순박하며 나이도 지긋한 중년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공동대표로 있는 서울 강남의 광고기획사 ‘잉크스팟 픽처스’에서 만난 박광현 감독은 그런 기대를 저버렸다. 눌러쓴 야구모자에 갸름한 얼굴, 이제 막 삼십대 중반을 넘긴 나이의 도회풍 사내였다. 영화 속에 넘쳐나는 투박하면서도 리얼한 시골정서를 그의 외모와 나이에서 찾기란 불가능했다.
-첫영화가 ‘대박’이 났다. 소감은.
“기쁘다. 그러나 부담스럽다. 다음 작품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또 작품보다는 수치로 기억될까봐 염려된다.”
-이렇게 많은 관객이 들 거라고 예상했나.
“아니다. 총 80억원(마케팅비 포함)이 든 영화다. 손익분기점을 넘겨서 제작사나 투자자한테 누를 끼치지 않았으면 했다. 다 만들고 나서 스스로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감독이 생각하는 흥행요인은 뭔가.
“어려운 질문이다. 힘없고 착한 사람들이 거대권력과 싸워서 이기는 얘기다. 나는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을 싫어한다. 삶에 지친 관객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열살까지 동막골같은 산골서 생활-
박감독은 말을 조리있게 잘 정리해서 얘기하는 편이었다. 그와 얘기하면서 ‘…동막골’의 성찬이 하루아침에 차려진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그는 4살 때 전북 남원의 두메산골 할머니댁에 맡겨졌다. 도시빈민이던 그의 부모가 조금이라도 입을 덜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가 열살이 될 때까지 자랐던 산골마을은 영화속 동막골과 다름이 없었다.
“그때가 1970년대 초였는데 검정고무신을 신고, 호롱불을 켜고 살았죠. 마을사람들이 모두 일가친척이어서 설날에는 아랫마을, 윗마을 돌면서 세배도 다녔죠. 내 또래 친구들은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이 거기 있었어요.”
그가 7살때 동네에 전기가 들어와서 점등식을 갖던 날, 30촉 전구의 위력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부모 자식 간에 가난 때문에 생이별을 해야 했던 건 분명 슬픈 일이죠. 명절때 저를 두고 다시 떠나시는 부모의 뒷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요. 그러나 돌이켜보면 저에겐 축복이었어요.”
11살이 돼서야 청주로 돌아온 그는 그림에 뛰어난 소질이 있는 학생으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동시상영관 영화의 매력에 푹 빠진 할리우드 키드였다. 초등학교 3학년이 돼서야 처음으로 ‘로버트 태권V’와 ‘슈퍼맨’을 보면서 놀랍고 새로운 스크린의 위력을 실감했다.
“중학교땐가 예쁜 여자교생이 장래희망을 적어내라고 했어요. ‘영화기사’라고 써내니까 이유를 묻더군요. ‘영화를 실컷 볼 수 있어서’라고 대답하니 ‘네 꿈이 그것밖에 안되느냐’면서 면박을 줬어요.”
영화기사 대신 홍익대 미대에 입학하여 디자인 전공을 택한 촌놈 박광현은 평탄치 못한 대학시절을 보냈다. 당시 88학번 동기들은 학교에 자가용을 몰고올 정도로 부유했고, 그림 실력도 뛰어났다. 도저히 그림으로 승부해서 그들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정표를 잃고 방황했다. 결국 군입대를 선택했다.
“제대하고 돌아오니 학교에 영상디자인 전공이 생겼더군요. 미술과 영상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매력적인 작업에 푹 빠졌죠. 친구들과 뮤직비디오도 찍으면서 정말 열심히 매달렸어요.”
그 당시 함께 작업했던 친구 중에는 ‘유령’을 만든 민병천 감독도 있었다. 그러나 영화에 대한 동경과는 달리 졸업과 함께 광고회사에 입사했다. 호구지책이었다. 대홍기획과 레오버넷에서 8년간 광고인으로 살았다. 그러나 마음은 늘 영화를 향해 열려 있었다. 티저광고의 전형을 보여준 마이클럽닷컴의 ‘선영아 사랑해’도 그의 아이디어였다. 또 최민식이 친구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교보생명 CF와 신하균이 출연한 맥도날드 광고 등을 만들었다.
“스타들을 기용하는 화려한 광고를 뒤집고 싶었죠. 무명들을 등장시켜 자연스럽게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시리즈광고를 만들어 나름대로 인정을 받았어요.”
-“힘없고 착한사람 내영화 주인공”-
그의 첫영화는 여러 가지로 미완성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문화계 멀티플레이어 장진. 그에게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간청했다. 그의 배려 덕분에 단편 ‘내, 나이키’를 만들었다. 2002년 6월, 월드컵 열기가 뜨겁던 그때 다른 두 편의 단편과 함께 ‘묻지마 패밀리’로 묶여 개봉됐던 영화는 함성에 묻혀버렸다.
“장감독이 데뷔작은 자신의 영화사에서 하자고 했어요. 어느날 장감독이 ‘웰컴 투 동막골’의 희곡을 주면서 한번 해보라는 거예요. 장감독은 ‘집으로’ 같은 작고 예쁜 영화를 원했는데 읽어보니 결코 간단한 영화가 아니었어요.”
꼬박 1년반 동안 시나리오 작업에 매달렸다. 모두들 동막골을 외부와 소통되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동막골을 완벽하게 외부와 차단된 이상향으로 그렸다. 그림을 그리면서 깨친 구도와 광선, 광고를 찍으면서 배운 카메라기법은 ‘초짜 감독’의 든든한 밑천이었다. 데뷔 첫타석 홈런은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선영아 사랑해’ 등 광고도 다수 히트-
환호작약하면서 들떠있을 법도 했다. 그러나 인터뷰 중간에도 계속 광고와 관련된 전화가 수시로 울렸다. 최근 찍은 광고는 비버(숲에 집을 잘 짓기로 유명한 동물) 소장이 등장하는 다숲아파트 광고시리즈. 역시 톱모델이 등장하는 아파트 광고유형을 뒤집은 드라마타이즈식 광고다.
-미야자키 하야오를 좋아한다고 했다. 당신 영화에서도 그 색채가 짙다.
“자연이 주는 치유능력을 믿는 감독이다. 또 사상이나 목적성을 띠지 않는 무정부주의자다. 엄숙주의를 조롱하는 유희정신도 좋아한다.”
-영화 제의가 줄을 이을 텐데….
“얼마짜리 영화니 해보자는 제의가 많다. 솔직히 돈보다는 내용이 문제다. 다음 영화는 현대물이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힘없고 착한 사람이 주인공이 될 것이다.”
그는 임순례 감독과 스티븐 소더버그, 리들리 스콧, 이마무라 쇼헤이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시는 아버지와 장남을 위해 늘 기도하시는 어머니를 뜨겁게 사랑한다. 그래서인가. 그의 대본에 써놨던 하이쿠(일본의 단가) 한 구절을 읊조리는 그가 참 믿음직스러웠다. ‘꽃잎이 떨어지네/다시 올라가네/나비였네.’
〈오광수 기획취재부장 oks@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