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자신만이 가지는 향기가 있다. 비록 처음 만나는 자리지만 얼굴과 몸짓, 눈빛, 그리고 던지는 말 속에서 은근하게 풍겨내는 그런 향기를 맡을 수 있다. 그 향내 속에는 그만이 가지는 삶의 이력과 시대정신이 녹아있다. 그럼 ‘김병익(金炳翼·57)’이라는 사람은 우리에게 어떤 향기를 내뿜고 있을까.
한국문단의 든든한 한 축이자 한국사회에서 얼마 남지 않은 대표적 지성이라고 정의한다면 합당할까.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유의 딱딱함보다는 그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분방함, 사고의 유연함에서 번져나는 외유내강형 선비라면 어떨까.
그런 그가 어쩌면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앉았다. 그것도 인생의 황금기를 다 보낸 황혼기에 말이다. 그 어울리지 않는 자리는 최근 출범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자리. 평소 그의 성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몇번 도리질을 쳤을텐데…’라고 생각했음직하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전 자리를 함께 한 그는 그의 말마따나 ‘참으로 어려운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을 오프더 레코드를 전제로 내비쳤다.
그 말을 들으며 한편 ‘안도’했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 사연에 재미있는 정의를 내려주었다. 현역을 마치고 귀가한 뒤 정말 생각지도 않았던 ‘공익근무’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스스로 그 ‘공익근무’가 달갑지 않다든지, 지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은 멍에라고는 하지 않았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물러나야 할 나이에 역류해 이 자리에 앉았다는 것이 여러가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면서도 “언젠가는 한번쯤 책임지는 의무를 져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역시 그다웠다.
그러면서 기자생활 중 썼던 ‘기자협회장’ 감투 이후 대사회적 단체라는 자리에 앉는 것은 처음이라고 덧붙인다. 사실 무한한 사유의 자유를 누려온 그에게 ‘꾼’들만의 모듬살이인 위원회 살림이 간단찮음은 물어보지 않아도 알 듯하다. 일부에서 들려왔던 우려의 두런거림도 사실 이런 환경이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 그럼 그는 어떤 생각으로, 어떤 심정으로, 아니 어떤 각오로 이 자리에 앉았고 그가 그리고 있는 밑그림은 도대체 무엇일까.
“참으로 할일이 많다”는 말로 입을 열었다. “과거 진흥원시대가 남겨놓은 관의 냄새를 닦아내는 것에서부터 현실적인 문화예술에 대한 민간모델의 정립, 갈증에 허덕이는 국민들의 문화적 욕구를 충족하는 일 등 어느것 하나 쉬운 게 없다”고 토로한다.
실제 얼마전 젊은 예술가 집단인 ‘오아시스 프로젝트’의 예총회관 옆 공간점령을 둘러싼 예총 관계자들과의 논쟁은 어쩌면 험난할 3년 세월을 압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논쟁은 불가피합니다. 물론 건설적인 결론없는 논쟁은 무의미하죠. 하지만 지금까지 진흥원시대는 이런 논쟁이라는 문화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어요. 2시간, 3시간이 걸릴지라도 그동안 가슴에 담아 놓았던 모든 것을 위원회 회의실에서 털어내고 녹여내야 합니다.” 그는 그래야만 진정한 민간인 예술단체의 새로운 모델이 자리잡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실제 출범 이후 40여일 동안 위원회는 ‘아직도 회의 중, 논쟁 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하지만 그는 이미 위원회를 이끌어가는 3가지 축을 파악하고 있었다. 위원회와 사무처와 소위원회, 이 3가지 축을 중심으로 의견이 개진되고 논의되고 현장에 그대로 실현되는 그런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 축들은 단단한 껍질을 두르고 있지만 조금씩, 서서히 그 구각을 깨고 변화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고 그는 평가했다.
“우선 사무처가 변하기 시작할 겁니다. 의례적으로, 습관적으로 올렸던 기안 자체가 소위라는 논쟁구조를 통해 걸러지면서 사무처 요원들의 인식 자체가 변화하기 시작했거든요.” 아직 이른 판단인지 모른다는 조심스러운 입장이지만 그 역시 쉽게 판단하지 않는 성격이고 보면 변화의 조짐은 뚜렷하다고 말해도 될 듯하다.
“얼마전 공연장에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과거에 비해 관중들이 작품을 보는 감각, 접근성향이 대단히 적극적으로 변했다는 겁니다. 1970~80년대의 그것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죠. 물론 저 스스로도 많은 반성을 했죠.”
그는 1,000달러 시대의 문화예술과 2만달러 시대의 문화예술은 분명 달라야 하며 지금까지 이런 시대적 흐름을 뒤쫓아왔다면 이제부터는 이 흐름을 앞에서 이끌어야 하는 게 위원회가 짊어진 짐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 예술인들의 창작의지를 북돋우는 공급쪽이냐, 예술을 소비하는 수요쪽이 우선이냐는 질문에 “수요쪽에 중심이 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중들의 문화욕구는 현재 영화, 가요 등 대중·상업쪽으로 많이 치우쳐 있다”면서 “이를 기초예술 쪽으로 가져오는 것이 급선무”라고 덧붙였다. 이는 아무리 현장성이 가장 큰 무기인 위원회라 해도 혼자서 감당할 수 없고 대중들과 예술인을 연결시켜주는 미디어 매체의 역할이 더없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직도 남아있는 질문을 던졌다. 여전히 문화부의 입김에서 자유스럽지 않은 게 사실 아니냐는 말에 그는 “‘팔길이 원칙’이라는 게 있다’며 문화부라는 ‘팔’ 안에서 움직이지만 그 속에서 예술지원의 ‘자유확보’라는 권리를 누린다”며 “문제는 관의 단점을 최소화하고 민의 장점을 극대화하는 윈·윈게임을 가져갈 수 있느냐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장기적인 한국문화예술에 대한 비전도 제시했다. 지방문화를 제대로 세우는 일과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예술단의 출범이 그것이었다. 그는 “지방에도 서울 못지않은 문화예술 시설들이 많다”며 “문제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그것을 채워주는 소프트웨어”라고 말했다. 소프트웨어를 위해 직접 위원회가 문화행사를 개최하기보다는 지방의 자생력을 키워주는 프로그램 지원쪽으로 방향을 가져갈 생각이라는 것.
여기에는 지방자치단체와 많은 문화재단의 협력과 정보교환, 인적·물적 교류가 필수적이라고 덧붙였다.
인터뷰 말미에 정말 해보고 싶은 일이라며 내내 숨겨왔던 속내의 한자락을 끄집어냈다. 균등분배, 소액다권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 이는 그리 어려운 말이 아니라 장르별로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극단, 무용단, 악단을 하나씩이라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을 대표하는 셰익스피어 극단처럼 ‘집중과 선택’을 통해 한국을 대표하는 극단을 키워내는 것”이라고 그는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이는 ‘확산역량’을 염두에 둔 말이다. 큰 나무를 키워내면 그 나무를 통해 대중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고, 이는 곧 대중화된 기초예술로 번져갈 것이라는 말이다.
‘선택과 집중의 대상에서 제외된 집단의 불평불만이 적지 않을 것 아니냐’는 말에 그는 “나 스스로 그 정도의 펀치는 견뎌낼 수 있도록 맷집을 빨리 키우는 게 숙제”라고 웃으며 말했다.
길지 않은 시간, 자분자분 조용히 그는 말했다. 단 한번도 음성을 높이거나 큰 몸짓, 손짓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에게서 풍겼던 향기와는 또다른 향기가 그를 감쌌다. 그리고 그 향기는 그가 떠난 이후에도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그 향기가 얼마나 오래도록, 멀리 번져갈지 3년을 지켜 볼밖에.
〈배병문 여론독자부장·사진 남호진기자 bm1906@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