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5~6년 전만해도 이땅의 씨름은 대단했다. 천하장사 대회가 있는 날이면 서울역은 물론 시내 대형전자 대리점 앞에는 TV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로 웅성거렸다. 그리고 각종 신문들은 ‘○○○, 천하를 움켜쥐다’라는 제목과 함께 두손을 번쩍 들어 포효하는 천하장사의 모습을 싣기에 바빴다. 또 초등학생들도 이만기, 이봉걸, 이준희, 홍현욱, 강호동, 이태현, 김경수, 김영현 등 기라성 같은 천하장사들의 계보정도는 꿰찰 정도였다.
-16개팀 지역대결로 부활 모색-
그랬다. 한때 이땅에는 씨름이 있었다. 민족과 함께 거친 숨소리를 내뱉고, 넘어지고, 뒤집어지고, 당기고, 밀치면서 살아 숨을 쉬는 씨름이 있었다. 그러나 요 몇년 사이 우리에게 ‘씨름’은 잊혀진 존재가 됐다. 그날의 그 우렁찼던 함성은 멀어졌고 포효하던 장사들은 세월의 뒷전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는 씨름을 마치 먼 옛날의 기억으로만 추억한다. 그러나 여전히 씨름은 이땅에 존재하고 있다. 꿈틀거리는 ‘현재진행형’이다.
최근 권한대행 꼬리를 자르고 14대 총재로 선임된 김재기 한국씨름연맹 총재를 만났다. 8·9대에 이어 3수째를 맞은 그는 자리를 잡자마자 격정적인 울분을 토해냈다. 그의 일성은 씨름인의 ‘자성’이었다.
“처음 총재를 맡아달라고 했을 때 말했다. 팀을 창단하지는 못한다고. 그래도 60여개 기업에 타진했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시대가 변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말하지 않아도 알지 않는가. 기업에 기대는 씨름으로부터 탈피해야 한다.”
시대의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씨름인들을 향한 질타의 다름아니었다.
그는 웃기지도 않는 일례를 들었다. LG 씨름단이 해체됐을 때 당연히 씨름단에 가서 항의해야 하는데 모두들 연맹으로 몰려와 총재에게 고함치고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축구, 야구단이 해체되면 축구협회나 KBO에 가서 농성하는가”라며 “지금까지는 허용됐는지 몰라도 더이상 안된다. 모든 책임을 총재에게 지우는 못된 버릇을 이제는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씨름인들이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회생책을 도모하지 않으면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다는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칭 스타라고, 모래판에서 성장하고 부를 이루고, 명예를 차지한 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어떻게 팀 하나 만들어내지 못하고 매번 기업에, 남에게 손을 벌리는가. 스스로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한다”고 그는 일갈했다.
사실 누가봐도 씨름단 창단은 요원하다. 씨름 내부 문제는 차치하고 악화된 경제상황, 치열한 경쟁, 노조라는 부담스런 존재 등등.
사면초가(四面楚歌). 그럼 김총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는 ‘씨름의 지역대결화를 통한 전국화’를 꿈꾸고 있다. 아마와 프로가 함께하는 통합전략이다. 프로 2개팀에 14개 지방자치단체팀을 합쳐 통합대회를 여는 것. 실력차를 우려할 필요는 없다. 프로단이 없어 아마에 남아있을 뿐 이들도 준프로를 훨씬 뛰어넘는 실력이다.
그는 “이를 바탕으로 국민들의 관심을 끈다면 자연스럽게 지역기업들의 팀 창단도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이 방식으로 치러진 김천대회는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중계거부 방송사 인식전환 필요-
그러나 여전히 발목을 잡는 걸림돌은 씨름중계 주간사인 KBS. 그는 이 대목에서 KBS의 ‘실종된 시대정신’을 거론했다. “KBS는 올들어 경영합리화를 이유로 중계권료를 주지 않았다. 중계도 하지 않았다. 1조3천억원이라는 예산을 가진 KBS가 달랑 13억원을 줄이기 위해 씨름을 외면하는 것이 과연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씨름이 우스개 쇼프로그램보다 가치 없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KBS가 씨름에 대한 인식전환을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씨름은 단순한 스포츠가 아닌 그 이상의 무엇이라는 것.
“추석때 많은 사람들의 항의가 있었어요. 차례가 끝난 뒤 ‘추석장사대회’를 보기 위해 TV를 켰는데 씨름중계가 없었던 거죠. 할아버지부터 3대가 즐길 수 있는 유일한 프로그램이 씨름인데 그것이 없으니 추석이 더욱 썰렁해졌다는 말들이 많았죠.” 그는 하루빨리 KBS가 민족문화에 대한 사명의식을 회복해 주기를 진심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희망이 영 없는 것도 아니다. 그의 집념의 산물이기도 한 ‘희망’은 최근 열린 ‘일본씨름대회’. 일부 씨름인들의 외면과 부족한 예산 등 열악한 환경 속에 치러진 이 대회는 한마디로 일본 열도를 씨름으로 들뜨게 했다. “얼마나 올지 사실 걱정이었지만 첫날 4,000명, 이튿날 7,000명이 씨름에 열광했습니다. 관중들은 대부분 일본인들이었습니다. 밀어내기식 스모를 생각했던 일본인들은 작은 체구가 엄청나게 큰 선수를 뒤집고 넘어뜨리는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죠. 기립박수는 물론이고요.”
실제 NHK에서는 재방영하는 등 적지않은 씨름열풍이 불었다. 그는 앞으로 일본 순회 경기를 통해 한류의 한 장르로 자리잡는 씨름을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곤 이내 일본에서는 그렇게 열광하는 씨름이 정작 국내에서는 외면당하는 현실이 믿어지지 않는듯 고개를 내젓는다. 김총재는 “민족의 소중한 자산인 씨름이 머지않은 날에 무형문화재로 전락해 용산 국립박물관에 그림으로 덩그러니 놓여질 수도 있다”는 섬뜩한 예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더욱 씨름인들의 원죄론을 거론했다. 그는 목소리를 높이며 “72개국이 씨름 보급을 원하고 있어요. 이는 씨름인, 특히 은퇴한 사람들의 몫”이라며 “더이상 연맹일에 간섭하지말고 해외로 나가야 합니다. 태권도라는 좋은 예가 있잖아요. 씨름이라고 못할 게 뭐있고 올림픽 종목에 들어가지 말라는 법은 또 어디에 있습니까. 선배들은 연말에 ‘씨름인의 날’에 와서 후배들 등이나 두드려주면 됩니다.” 씨름인들의 제자리 잡기를 요구하는 말로 들렸다.
그동안 연맹 총재는 종이호랑이였다. 오경의·엄삼탁씨 등 역대 총재들이 씨름단 창단이라는 덫에 걸려 중도사퇴해야 했다. “저의 이력을 아시는 분들은 모두 말렸어요. 하지만 제가 일으켜 세운 씨름이 이렇게 무너지는데…. 마지막 봉사라고 생각하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씨름을 바로 세울 분이 있다면 내일이라도 그만둡니다.” 그러면서 그는 “있는날까지는 그 어떤 압력에도 절대로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日팬열광에 순회대회 성공예감-
스스로 씨름인은 아니지만 이세상 누구보다 씨름을 사랑한다는 김재기 총재. 2시간동안 그는 가슴에 응어리졌던 모든 것을 쏟아냈다. 집착과 각오, 국민들에 대한 죄송함과 더 큰 관심을 부탁하기도 했다. 또 시대정신을 잃어버린 KBS와 씨름인들에게는 자성을 요구했다.
“어떤 경우든 씨름을 무형문화재로 만들진 않겠습니다. 다행히 오는 기장대회에는 프로와 아마팀이 총출동해 대회를 치릅니다. KBS도 비록 중계료를 내지는 않지만 중계를 약속했습니다. 참 어려운 고비를 넘긴 셈이죠.” 비로소 그의 입가에 웃음이 비친다.
‘사랑의 완성’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좋아했다 틀어졌다 미워했다 싸우고, 또 돌아보고 이해하고 안아주는 그 지난한 과정의 산물은 아닐까. 씨름과 지독한 사랑에 빠져 있는 한 사람을 만났다. 어둑해진 장충체육관을 나서며 언젠가는 그의 사랑도 진정한 완성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배병문 여론독자 부장/ 사진 이상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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