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한해의 마지막날까지 무대에 선 명창 안숙선(57·중요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기능보유자). 평소 잘 걸리지 않는 감기 몸살을 앓으면서도 무대에 섰다. ‘국악을 위한 자리인데, 소리를 들으려 온다는데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달려가야지.’ 그는 한해 마지막날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적벽가’를 완창하며 잔치를 벌였다. 관객들과 어울려 국수도 한 그릇 먹고 막걸리도 한 사발 들이켜고 그러면서 국악을, 판소리를 친근하고 흥겹게 느끼게 하고 싶었다. 되돌아보면 그랬다. 어느 해에 연말연시 특별행사로 제야의 종이 울릴 때까지 판소리가 흥겹게 울려 퍼진 적이 있었던가. 그는 신명나게 판소리로 묵은 한해를 보내고 환하게 새해를 열고 싶었던 것이다.
#잠시도 쉬지 않는 오척단구의 명창
안숙선을 처음 보면 먼저 작고 아담한 외모에 놀라게 된다. ‘저 작은 몸 어디서 용솟음치듯 소리가 터져 나올까.’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지만 ‘수면 아래 보이지 않는 백조의 발’처럼 그 또한 남다른 공력을 기울였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또 하나, 안숙선을 오늘까지 이끌고 온 것은 국악에 대한 그의 애정이다.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뜨거운 사랑, 일방적인 사랑, 매달리는 사랑, 베푸는 사랑, 여린 사랑, 질긴 사랑, 애틋한 사랑…. 안숙선의 국악에 대한 사랑은 질기다. 태어나서부터 민요와 판소리, 장고소리를 듣고 자란 그는 50여년 동안 단 한번도 국악을 놓아본 적이 없다. 처음엔 선보는 자리에서 만난 인연처럼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국악을 만났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빠져들고 마침내 평생 껴안고 가야 할 대상임을 느끼게 된다.
그가 판소리계에 기여한 바가 여럿 있겠지만 무엇보다 판소리의 대중화에 기여한 공이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담한 외모와 애절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화려한 소리로 대중에게 다가가 판소리계의 스타로 우뚝 섰다.
안숙선 명창은 판소리가 필요하다고 부르는 자리는 어디든 달려갔다. 명창의 체면보다 판소리를 널리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2002년 처음으로 심야 야외공연을 펼쳤을 땐 비를 맞으면서도 ‘수궁가’를 완창해 관객들을 감동시키기도 했다. 지난해 독도문화연대 창립기념공연 ‘독도! 문화로 지킨다’에서 창작 단가 ‘독도충렬가’와 판소리 ‘안중근 열사가’를 선보였으며 서울 명동성당에서 있었던 교황 베네딕토 16세 취임 축하 자리에서는 판소리 ‘시편 23편’을 올리기도 했다.
재작년 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장을 맡아달라고 했을 때 그는 처음엔 행정가가 아니라 맡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다가 결국 ‘이것도 판소리의 활성화에 도움되겠다’ 싶어 일을 맡고 말았다.
잇단 공연을 하면서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로 제자 양성에도 열성을 보였다. 국립창극단 예술감독으로 후배를 양성하는 것도 모자라 서울 강남구 세곡동 그의 자택에 연습실을 차려두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국악의 저변을 확대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하리.’ 국악에 대한 그의 애정은 그를 쉴 틈 없이 내달리게 했다. 어릴 적 즐겼던 국악이 이제는 그가 짊어질 책무가 되었음을 그는 익히 알고 있었다.
#국악의 길로 들어선 것은 운명이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전북 남원이다. 소리 한자락 못하면 남원사람 아니라고 할 정도로 국악의 고장 아니던가. 부모는 평범한 분들이었지만 외가쪽으로는 국악계 큰 인물이 많았다.
대금산조 중요무형문화재 강백천과 동편제 판소리 중요무형문화재 강도근이 외삼촌이었으며 친이모인 강순영은 가야금의 명인이었다. 어려서부터 판소리, 가야금, 장고, 북, 꽹과리 등 국악의 소리 속에서 자랐다. 그는 남원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자연스레 국악의 길로 들어섰다.
어른이 시키면 그저 그래야 하는 줄로 알았던 어린 시절, 아홉살난 어린 안숙선은 이모 손에 이끌려 명인 주광덕에게 소리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선생님 얼굴도 제대로 못보고 큰절을 올린 다음 소리를 했다. 선생님은 “그만 하면 쓰것다” 하며 그날부터 제자로 받아들였다. 얼마나 긴장했는지 일어서려니 무릎이 펴지지 않았다.
이모에게서는 가야금을 배웠다. 열두줄 가야금 줄을 퉁기다 보니 금세 여린 손가락이 터졌다. 그래도 오묘하고 아름다운 그 소리가 좋았다. 곧바로 남원국악단 소속으로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그는 어린 나이지만 열심히 하면 집안 살림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했다. 2남3녀 중 장녀. 오빠 학비를 보탤 생각까지 하며 장고도 치고 소리도 했다. 형제들 중 국악의 길을 걷는 이는 그와 바로 아래 동생 안옥선(중앙대 국악대학 가야금 초빙교수)뿐이었다.
남원국악원은 오늘날 안숙선이 있게 한 둥지였다. 거기서 강도근 외삼촌으로부터 수궁가, 흥부가, 적벽가, 춘향가, 심청가 판소리 다섯마당을 배웠다. 이어 국립창극단에서 활동하며 정광수 명창에게 수궁가를, 박봉술 명창에게 적벽가를, 성우향 명창에게 강산제 심청가를 배웠다. 이모(강순영)가 진주국악원 사범으로 가 있을 땐 진주에 가 검무와 승무 등을 배웠다.
안숙선의 국악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은 만정 김소희와 향사 박귀희다. 안숙선은 1970년에야 상경, 김소희 선생의 제자가 되었다. 더욱더 다양한 예능을 갖추기 위해 73년 박귀희 선생을 찾아갔다. 다른 대가의 제자를 다시 제자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분위기였지만 박귀희 선생은 가야금 병창을 전수했다. 살아가면서 한명의 대가에게 배움의 기회를 얻기도 힘든데 수많은 대가들에게서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안숙선의 복이다. 그는 86년 남원춘향제 전국명창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아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영광의 무대, 아쉬움도…
안숙선은 79년 국립창극단에 입단하면서 국악에 대한 애정은 자부심과 신념을 더하게 됐다. 그때는 결혼도 하고 아들 둘에 딸 하나를 둔 가정주부로서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생활을 할 때였다. 당시 그는 소리에만 매달렸다. 국악에 온몸을 바치는 스승들을 보았고 ‘나 또한 국악을 위해 살리라’고 다짐하며 살았던 시대다. 모든 생활이 국악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심청가에서는 심청역을, 춘향가에서는 춘향역 등 수많은 창극의 주인공을 맡아 소리의 절정기를 이루었다. 그새 아이들은 훌쩍 커서 제 스스로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손녀를 안겨 주었다. 명창 안숙선이 ‘할머니 안숙선’으로 돌아오는 순간, 그는 인간사에 대해 다시 눈을 떴다.
“하루 종일 손녀를 바라보고 있어도 지겹지 않아요. 생활 속의 작은 행복들을 이제야 느끼고 있어요.”
명창 안숙선은 국악을 위해선 아쉬울 것 없을 만큼 세월을 바쳤지만 돌아보면 아이들에게 따스한 손길 한번 못내민 것이 못내 아쉽다. 여느 소녀들처럼 친구들과 재잘대던 시절도 없었다. 국악을 하며 많은 것을 얻었지만 생활속에서 느낄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는 얘기다. 그러면서도 국악에 대한 사랑은 여전히 질기다. 새해엔 뭘 할 건지, 어떤 계획을 갖고 있냐고 묻자 못다한 공부를 하고 싶단다.
“그동안 한 몇년 행정 아닌 행정(전주세계소리축제 조직위원장 자리를 맡았던 것)을 보느라 분주했는데 이제 학교(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로 돌아가 제자들을 가르쳐야죠. 그리고 마음 턱 놓고 소리 연마를 하고 싶어요.”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온 국악인생 50년. 그는 영원한 춘향이고 심청이다.
〈인터뷰/이동형 매거진X 부장 spar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