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4월 중순 오전 11시. 중년의 한 사내가 사라졌다. 목욕을 간다며 집을 나선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3살짜리 막내아이를 재우느라 배웅도 하지 못했던 아내는 사내를 백방으로 찾아헤맸다.
“우리가 잘 모시고 있습니다. 호텔에서 호강하고 있습니다.” 사내는 정보부라는 듣도 보도 못한 곳에 끌려가 있었다. “무슨 잘못으로 그는 그곳에 있을까.” 아내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아내가 사내를 본 것은 3개월 후 서울 필동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였다. 사내는 푸른 수의를 입고 서 있었다. 죄목은 당시 대학가의 반유신투쟁조직이었던 민청학련을 배후조종한 인혁당의 핵심 멤버. 헌병들이 도열한 숨막히는 법정. 긴장과 침묵, 공포. 그 속에서 사내가 아내를 돌아보았다. 옷깃을 잡으며 ‘여보, 수의를 대신할 옷을 넣어줘요’. 이어진 3번의 재판. 마지막이 된 대법원 재판에서 사내를 비롯한 8명에게 ‘사형’이 내려졌다. 그리고 17시간 만인 75년 4월9일 사내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면회하러 서대문으로 가면서 사형 집행 소식을 들었어.” 하재완. 당시 42세. 아내의 말처럼 “한창 가정의 따사로움과 자식들의 성장을 기꺼운 눈으로 바라보았던” 사내는 그렇게 떠나갔다. 아내가 사내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서대문 형무소 벽돌 틈을 통해서였다. 벽돌 틈으로 사내를 향해 외친 “여보”라는 한마디에 휘둥그레진 눈으로 고개를 돌렸던 사내.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그렇게 떠났고, ‘빨갱이의 아내’ ‘빨갱이의 자식’이라는 지독한 유산만이 남았다.
그 지독한 유산을 아내 이영교씨(71)는 ‘적과의 삶이었다’고 말했다. 온통 적들로 둘러싸인 고립무원의 삶이라고 했다. 빨갱이라는 ‘주홍글씨’, 그것은 벗어던질 수 없는 업이요 족쇄였다.
“방에서 자고 있는 다섯 아이들을 보면서 이놈은 큰집으로 보내고, 저 아이는 작은집으로 보내고…. 몇번을 다짐했지만 차마 할 수 없었어.” 세월을 되짚는 아내. “언제 어떤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항상 긴장해야 했고, 칼을 마음속에 지니고 살아야 했지.” 집 주변을 서성이는 점퍼를 입은 사내들. “아지매, 나가면 안됩니다. 대통령이 내려와도, 국무총리가 와도, 카터, 포드가 와도 집안에 갇혀 있어야 했어.”
그러나 유신정권의 감시보다 더 무서운 게 주변사람들이었다. 이사를 수도없이 다녔지만 언제나 소문은 그들을 따라다녔고 그 쑥덕거림은 가족의 온존한 삶을 파괴했다. ‘남편이 유명한 빨갱이라카데….’
“마치 호열자 환자 보듯 했지. 몸을 스치기라도 하면 큰일 날 듯 옷깃을 확 잡아채는 그들을 보면서 죽음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그래도 살아야 했다. 5남매. 그들을 위해 모래알 같은 밥을 삼켰고, 소화제를 먹으며 밥을 넘겼다. 모든 것은 아이들을 향했다.
“자식들 하나하나 다 미안하지.” 하지만 아이들이라고 어찌 지독한 유산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간첩의 자식’이라며 놀려댔지. 동네는 물론 소풍가서도 온갖 수모를 당해야 했어. 아이들이 하얗게 질려 들어오면 동네 아이들을 찾아가 머리를 쓰다듬고, 아이스케키를 사주며 우리 아이 괴롭히지 마라. 함께 잘 놀아다오라고 애원했어. 어찌 내 가슴에 분통이 없었겠어….” 그렇게 하루하루 버티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집에 있던 가전제품을 팔고, 집을 팔고 전셋집으로 내려앉으면서 참기름, 미역, 멸치, 옷을 팔아 삶을 버텨갔다. 그는 큰아이에게 참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때 15살이던 큰아이는 아버지가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장례식때도 “아버지의 혐의가 벗겨질 때까지 절대로 장례를 치를 수 없다”며 버티던 아이였다. 학교도 한 곳에 머물 수 없었다. “선생님은 감시했고, 아이들은 경계했지. 모두 그를 피했어. 창녕을 가도 그랬고, 다시 대구로 와도 그랬어.”
그는 “누가 먹을 것이라도 들고 오면 아이들은 내 눈치를 먼저 살폈어. ‘먹어도 되느냐고.’ 내가 고개를 흔들면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어. 왜. 그걸 되팔아 비누도 사고 쌀도 사고 해야 하는 걸 알았으니까”.
아내는 독립운동가 집안의 딸이었다. 친정아버지, 큰아버지, 사촌오빠 모두 조국을 위해 목숨과 재산을 바쳤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가족사. 아버지가 그토록 되찾으려 했던 조국이 그 딸과 가족을 핍박하고 삶을 파괴하는 이 비극사에 그는 할 말을 잃었다. 친정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항상 그를 붙잡고 통곡했다. “영교야, 왜 너가 내 팔자를 이렇게 닮느냐. 나는 광복이 되었어도 잃어버린 남편 때문에 울었는데, 너가 또 남편 때문에 이렇게 피눈물을 삼키고 살다니…”라며. 그러나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가 없었다. 법정에서 빤히 돌아보던 그 눈망울, ‘여보’라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그사람, 하선생(지금도 아내는 사내를 이렇게 불렀다)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많이 미웠지. 아버지의 삶을 알기에 남편은 가정에 충실했으면 싶었지. 그래서 불만도 많았어. 하지만 그를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나무라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지.” 번번이 끌려간 정보부에서 ‘모임을 하지 않겠다. 오직 자식만을 키우겠다”는 각서를 써야 했다. 그러다 2000년 12월 국회의사당 앞에서 유가협회원들과 함께 천막농성에 들어가면서 발벗고 나섰다. 그는 “천주교 인권위원회와 ‘인혁당 당수신부’로 불리는 문정현 신부, 김형태 변호사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흑백사진으로 남은 거실벽 남편을 바라보며 산다. “정보부가 씌운 혐의 32개 중 6개만 인정했어. 한·일수교는 굴욕이다, 유신은 철폐돼야 한다는 것 등 대부분 그시대 사람들이 공유했던 것이었어. 그것이 무얼 말하겠어. 다른 죄목은 모두 고문으로 시인한 것이라는 말이었지.”
하선생은 죽어 아내에게, 그 시대 사람들에게 글을 남겼다. “각국 수뇌들이 임의대로 38선만 긋지 않았던들 오늘과 같은 희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죽은 남편의 수의 속에서 나온 그 메모를 아내는 지금도 깊이깊이 간직하고 있다. 아내 역시 남편에게 글을 전했다. ‘나는 알아요/당신의 모든 것을. 나는 믿어요/당신의 인내를. 하늘은 결코 당신과 나를 갈라놓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썼다. 애들 사진과 함께 보낸 그 글을 남편은 눈시울을 붉히며 읽었다고 변호사가 전했다. “그거라도 잘 보냈다는 생각이 지금도 들어.”
이제 한시름을 놓을 만한데, 그는 아프다. 그를 끈질기게 버티게 했던 억울함과 고통이 재심결정으로 조금은 사그라졌기 때문일까. “이 정부가 더이상 끌지말고 빨리 인혁당 문제를 풀었으면 좋겠어. 나도 이제 인혁당의 고삐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마지막 남은 소망인 셈이다.
그러면서 그는 “너무 늦었다. 역사의 흐름이 너무 늦게 흘렀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세월”이라며 “하선생을 죽이지만 않았더라도 끝이 있을 텐데. 가버리고 난 뒤, 어떻게 끝이 있겠나. 끝은 없다”라고 한숨지었다.
역사라는 이름으로 한 여인과 그 가족에게 가했던 무자비한 폭력. 32년 만에 이제 겨우 마음의 한자락을 풀어냈다는 그는 기자에게 “찍은 사진 중에 영정으로 쓸만한 것이 있으면 하나 보내주소”란다.
“그럼요, 어머니. 웃고 있는 사진으로 드릴게요.” 반역의 역사를 잊고 살았던 스스로에 대한 자책을 알량한 사진 한장으로 속죄하려는 것일까.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어머니, 이제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세요”라며 차마 놓지 못할 손을 놓고 저무는 해거름 대구를 떠났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곳을 서성이고,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았을까라는 물음은 아직도 머리속을 맴돈다.
〈배병문 여론독자부장/ 사진 김대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