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이고 있는 맞배지붕의 우아한 선은 첫날밤 신부를 닮았다. 격자무늬 창틀의 흰창호는 겨울햇빛에 눈이 부시다. 돌담밖 소나무는 눈 속에서 푸르고, 대숲에서는 겨울바람이 서걱이며 사랑채를 기웃거린다. 아궁이에서 타고 있는 장작만 봐도 후끈 덥혀졌을 구들목에 몸을 지지고 싶어지는 집. 수백년 이끼에 뒤덮인 고택(古宅)은 기품있는 선비를 연상케 한다.
경북 안동시 임동면 박곡리에 자리잡은 지례예술촌. 앞으로는 임하호를, 뒤로는 일월산이 병풍처럼 둘러친 그곳에 400년 된 고가가 고즈넉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 숙종때 대사성(大司成)을 지낸 지촌 김방걸의 종택과 제청, 사당 등 모두 10여동이 모여있는 곳이다. 지촌 선생의 13대 종손인 김원길 촌장(64)이 임하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놓인 건물들을 3년여에 걸친 공사(1986~1989) 끝에 이 자리로 옮겼다. 그뒤 고택을 예술인들을 위해 개방, 지금은 지례예술촌으로 더 유명한 곳이다.
한평생 종가(宗家)를 지키면서 고가(古家) 보전에 앞장서온 시인이자 안동대 국문과 교수였던 김원길 촌장을 만났다. 그는 종가를 예술인촌으로 키운 자부심과 종가 지키기의 어려움을 동시에 토로했다.
“재미소설가 김용익 선생(‘꽃신’의 작가)이 우연히 제 집에 들르셨다가 미국의 아티스트 콜로니(예술인촌)처럼 꾸미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하셨어요. 미국에 가셔서 브로셔도 보내주시고, 와서 직접 보라고 초청장도 보내주셨죠. 돌아가신 부친께서 흔쾌히 허락하셔서 대공사 끝에 예술촌을 만들었어요.”
그동안 이 집을 거쳐간 예술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시인 구상과 김구용, 조병화 선생을 비롯해 소설가 강신재, 한수산, 이문열씨 등이 이곳을 창작의 산실로 삼았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무용가 홍신자, 철학자 김용옥, 연출가 임영웅, 국악인 임동창씨 등도 이 집의 단골손님이었다. 요즘에도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드라마 작가, 만화 스토리 작가 등 젊은 창작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몇년전 선비 세계의 포복절도할 유머를 모은 책 ‘안동의 해학’(현암사)을 펴내기도 했던 김촌장은 무엇보다도 수년간 찾아온 외국관광객들에게 한국의 문화를 알려온 것이 큰 수확이라고 했다.
“웃지 못할 일도 많았어요. 요를 침대처럼 쌓아놓고 잠을 잤던 대사 부부도 있었고, 온돌방이 갈수록 따뜻해지는 이유가 뭐냐고 꼬치꼬치 묻던 미국 여학생도 있었지요.”
1년이면 10차례 제사를 지내고 수많은 손님을 치러내야 하는 종가집 종손(宗孫)과 종부(宗婦)의 삶은 결코 만만한 자리가 아니다. 그는 종손으로서의 숙명을 받아들이면서, 종가를 예술인촌과 외국인의 한옥체험장으로 활용하여 어려운 자리를 지켜온 셈이다. 이제 연간 매출액 1억5천만원, 연인원 5,000명이 찾는 고택이 됐다.
그러나 전국 대부분의 고택들은 급속한 산업화로 인한 농촌인구의 감소 등으로 퇴락의 길을 걸어왔다. 큰 덩치의 집을 관리하고 보수하는 것은 물론 때마다 제사를 지내는 일까지 떠맡아야 하는 종손들이 하나 둘 집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다.
“제 친구 한 사람은 결혼해서 무역회사를 다니다가 부친이 사망하여 시골 종가를 짊어지게 됐죠. 그런데 시골에 가서 얼마되지 않아 폭음으로 인해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지금은 동생이 직장을 그만두고 내려와 청상과부가 된 형수를 모시고 종가를 꾸려가고 있죠. 서울에서 편안한 아파트에 살다가 화장실이나 샤워시설도 변변치 않은 종가에 내려와 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500년 가문의 종부(宗婦)가 종손을 데리고 미국으로 가서 연락을 끊어버리는가 하면 봉제사와 접빈객에 지친 종부가 이혼을 요구해 온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맞선에서 번번이 퇴짜를 맞는 종가집 종손도 있다고 했다.
김촌장은 전국의 고택을 보전하기 위해 무언가 특단의 대책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창동 전 문화부장관에게 건의하여 2004년 사단법인 고택문화보전회를 출범시켰다.
“고택이야말로 문화적이고, 자연친화적이고, 교육적인 공간입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고택들을 전통생활 체험시설로 만들어야 한다고 정부당국에 건의했어요. 제 경험상 고택은 개방하고 활용해야 지켜질 수 있어요. 그래야만 종손이나 종부가 종가를 버리는 일이 없죠.”
고택문화보전회의 출범과 때맞춰서 문화관광부가 고택관광자원화 사업을 시작했다. 이를 위해 전국 고택 중 25개의 대상가옥을 선정하여 각각 10억원을 지원했다. 화장실이나 샤워실, 입식부엌 등 최소한의 편의시설을 갖춰야만 외국인이나 내국인 손님을 받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문화재청이 비토를 놓고 나선거죠.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고택의 원형을 훼손하는 건 문화재보호법에 저촉된다는 이유였어요.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도 현대식 화장실이 설치돼 있는데 무조건 하지 말라는 건 문제가 있습니다.”
김촌장은 이 대목에서 언성을 높였다. 원형을 훼손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편의시설을 설치할 수 있는데 법만을 내세워 이를 막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정부에서 요즘 ‘한’ 브랜드화 사업을 펴고 있어요. 한복, 한지, 한글, 한식 등 ‘한(韓)’자가 들어간 우리 문화를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거죠. 그러나 한옥체험이야말로 밖으로 나가서 알리는 게 아닌 안으로 끌어들여 우리 문화를 알릴 수 있는 최고의 수단입니다.”
그는 누대로 물려받은 종택을 한류문화 체험관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은 물론 자식들까지 준비된 문화전도사로 만들었다.
그는 영어에, 여동생은 불어에, 딸은 중국어에 능통하다. 아들은 일어와 문화체험관 운영과 관련된 공부를 했다. 한 가족만 모이면 세계 어느 나라 관광객도 너끈히 치러낼 수 있는 셈이다.
“우리집은 예술인촌으로 특화했지만 전국의 모든 고택이 예술인촌이 될 필요는 없죠. 바둑이나 서예, 한복, 한식 등 주인 취향에 따라 특화할 수 있어요. 세계 어디에나 있는 호텔과는 다른 한국에만 있는 체험장이 돼야 합니다. 그런 날이 올 때까지 열심히 뛰어볼 생각입니다.”
그는 요즘도 인터넷을 통해 예약손님을 받고, 안동시내에서 시내버스도 다니지 않는 첩첩산중의 예술촌까지 손님들을 실어나른다. 또 강원 영월에서 보길도까지 고택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자문역을 마다하지 않는다. 전통을 계승하고 보존하는 데 있어서 무조건 법과 제도에 따라서 하라는 식의 낡은 방법으로는 안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제 곧 설입니다. 전국의 종가에 문중어른들과 어린 손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겠죠. 명절이 즐거워야 합니다. 설날 아침에 모여 퇴락해가는 종가를 걱정하는 일이 더이상 없어야죠.”
인터뷰가 길어져서 사랑채 내중문(內中門) 밖으로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저녁 하늘에 어느새 별들이 촘촘하게 박히고, 아궁이에 타들어가던 장작불도 연기를 내면서 사그라들고 있었다. 휴대폰도 터지지 않는 첩첩산중의 밤. 금세라도 아낙네의 다듬이소리와 선비의 글읽는 소리가 들릴 듯했다.
<인터뷰/오광수 기획취재부장>
<사진 안동/이상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