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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일 “독서날개 달아주는 일은 정년 없죠”

입력 2006.02.12 17:34

정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 물러남을 뜻한다. 그래서 정년은 아쉬움을 넘어 두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조직으로부터, 사회로부터 멀어져 간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회한을 남긴다.

사진/김문석기자

사진/김문석기자

문학비평가로 평생을 살아온 경희대 도정일 교수(65)도 오는 28일이면 23년간 섰던 강단을 뒤로 한다. ‘아직 할 일이 많은데…’라는 마음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웅얼거림이 어찌 없을 수가 있을까만, 그에게 진정한 의미의 정년은 아직 먼나라의 이야기인 듯하다.

“42살때 강단에 설 때만 해도 상당히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는데, 지금 돌아보니 순전히 착각이었어요. 느리고 게을러 아마 정년을 깊이 인식하려면 10년은 더 걸릴 것 같아요.” 9일 대학로 일석기념관 2층 책읽는 사회만들기 운동본부 사무실에서 만난 그의 말속에는 못다한 가르침에 대한 아쉬움과 아직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 정년에 대한 소회가 묻어났다. 누구에게나 프로스트의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은 있을 것이다. 남들은 최선을 다한 삶이었다고 평가하지만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은 그에게도 있었다. 그럼 이제 그는 무엇을 하려 하는 것일까. 공식적으로 자신의 삶을 지탱했던 강단이 사라지고, 그의 입과 눈을 바라보았던 제자들이 가버린 텅빈 강의실처럼 그에게 남은 세월은 어떤 빛깔로 다가올까.

-“인문학의 위기는 인간가치의 몰락”-

“인문학의 위기를 10년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외쳐왔지만 나아진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 책임의 많은 부분을 저같은 인문학자들이 져야 합니다. 제대로 말하지 못한, 제대로 싸우지 못한 책임을 벗어날 수가 없죠. 그래서 이제 강단이라는 큰 숙제를 벗어던졌으니 그쪽으로 남은 생을 살아갈까 합니다.”

실제 그에게 현재 세계와 국내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대부분은 제자리를 잡지 못한 인문학의 위기와 일맥상통한다. “인문학은 고루한 학문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가치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한 그는 “각종 사회현상과 인문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관관계를 갖고 있으며 이를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고 알리는 작업을 시작하려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마호메트 만화를 둘러싼 이슬람과 서구문명의 갈등과 충돌 역시 인문학적 시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우선 이슬람이라는 종교에서 경전이 가지는 신성불가침, 경전해석의 자유를 가지는 기독교 문명, 해석학, 세속주의, 계몽주의, 신성성 등 여러 관념들이 종합적으로 녹아있는 만화갈등은 인문학적 밑바탕이 없으면 읽어낼 수 없다”며 “신성성을 유지하려는 사회와 신성성을 잃어버린 사회가 벌이는 문명충돌이 만화갈등의 두 축”이라고 설명했다.

-어린이도서관 세우는 일 큰 보람-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인문학적 소양을 인식시키고 발현하기 위해 시작한 것이 바로 ‘책 읽기 운동’이라고 밝혔다. 일부에서는 인터넷이 판을 치는 정보화사회에 무슨 책 읽기냐고 하지만 인터넷의 영역과 책의 영역은 분명히 갈라져 있다는 게 그의 지론. 생활정보는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지만 고급정보는 책에만 있으며 특히 창조에 필요한 지식은 오직 책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책 읽기는 인간에게 판단, 비판, 사고력을 불러 일으킨다”며 “인문학적 소양의 기본틀을 잡아주는 것이 책 읽기”라고 정의했다. 그래서 책 읽기는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과 인식, 방향을 설정해 주는 간단하지만 가장 가치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5년간 ‘느낌표’ 덕분에 그의 책 읽기 운동은 적지않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자평했다. 지난해까지 8곳의 어린이 도서관이 설립됐다. 또 3월이면 부평에 9번째 도서관이 서고 내년에는 전북 정읍에도 10번째 도서관이 문을 연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성에 차지 않는 듯하다. “아직 정부나 지자체의 인식이 부족합니다. 경기도와 서울시가 투자를 확대하고 있지만 콘텐츠와 설계에만 2억5천만원이 드는데 책사회가 감당하기에는 힘들죠. 그래서 이제는 1년에 1개 정도만 세우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5년간의 운동과 시시때때로 벌어지는 책읽기 캠페인에도 여전히 부실한 우리의 독서역량은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단순히 바쁜 사회생활, 입시전쟁으로만 치부할 수 있을까.

그는 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독서와 도서관의 중요성이 생활속에 자리잡는 데는 한 세대가 흘러야 합니다. 한번 보세요. 우리 어릴적, 도서관이 있었습니까. 기껏 대학 와서야 도서관이라는 문화를 접했고 그것도 대학공부를 위한 것이었지 생활속에서 접한 도서관은 지금도 전무하다고 해야 하겠죠.” 생활 주변에 가서 책을 접할 수 있는 도서관의 부재. 그것이 책 읽기가 부진한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풀이했다. 그래서 그는 “한 세대가 흐를 동안 이 운동을 계속하고 도서관 짓기를 중단하지 않는다면 후세대들은 분명히 책과 도서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될 것이며 그때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인문학적 시각, 문화민족의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년 이후에도 그가 도서관 운동을 지속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로 들렸다.

-한세대가 흘러야 생활속 독서 가능-

그는 또 도서관은 단지 책 읽는 곳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대단한 가치를 지닌다고 덧붙였다. “양극화, 양극화 하지만 가장 심각한 것이 정보의 양극화입니다. 돈 있는 사람은 책을 사서 볼 수 있죠.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책을 사려 해도 살 수가 없어요. 정보의 불평등은 지식의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이는 곧 소득의 불평등으로 이어져 극심한 양극화의 한 단초가 된다”고 그는 말한다. 여기에 도서관의 사회안전망 역할도 덧붙였다.

“순천에 도서관을 세웠을 때 주부들이 몰려와 울었습니다. 책을 사줄 수 없는 서민의 입장에서 도서관은 한시름을 풀어놓는 곳이죠. 거기다 탁아와 학습, 독서가 한곳에서 가능하니 이만한 사회안전망이 어디 있습니까.”

-“문학·문명등 주제 책 쓸것”-

인문학 위기 못지않은 것이 바로 오늘 이 시대 대학이 겪고 있는 위기. 대학에 몸담았던 그는 그 위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지금은 모든 가치를 시장원리주의가 삼켜버렸죠. 그 엄청난 쓰나미 앞에 대학의 낮은 울타리가 온전하다고 말한다면 웃겠죠. 어떤 이들은 이를 대학의 시대적 변화라고 하지만 그건 변화가 아니라 ‘변질’입니다. 본래의 성질을 완전히 잃어버린….” 시장의 요구는 곧 기업의 요구이며 대학은 이미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는 기업에 전사(戰士)를 공급하는 곳’이 돼 버렸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놓칠 수 없는 것이 온존한 ‘시민’ ‘인간’을 길러내는 대학의 존재가치라고 그는 거듭 강조했다. 돈 되는 일이 아니면 연구조차 할 수 없는 대학의 위기, 그것은 곧 젊은이들의 위기이며 이 시대가 ‘방황’을 끝내지 못하는 이유라고도 말했다.

책운동과 더불어 멈출 수 없는 것이 글쓰기. 그는 인문학의 기초인 ‘신화론’, 삶에 문학적 상상력은 왜 필요한가를 주제로 한 ‘대중문화론’, 서구문명을 이해하는 핵심인 Story(이야기)를 다룬 ‘서사이론’을 쓸 계획이다.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몸으로 그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이미 조그마한 동굴도 마련해 놓았다.

정리 안된 덥수룩한 머리카락, 굵은 안경테, 손에 놓지 않는 줄담배로 이미지화 된 우리 시대의 지성인 도정일 교수. 그는 아마 동굴로 들어서며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어디 갔는가, 인간의 가치는 어디 있는가’라고. 그리고 그 물음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곧추세워야 하는 ‘화두’가 아닐까.

〈글 배병문 여론독자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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