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훈 칼럼

식객들을 위한 ‘명함용 벼슬’

한나라당이 며칠 전 36명의 부대변인을 임명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텔레비전에 나와 논평하는 낯익은 대변인 말고도 당의 공식적인 ‘입’으로 나설 수 있는 사람이 36명이라는 얘기다. 그나마 사무실로 출근하는 부대변인은 2명의 수석 대변인을 포함해 12명뿐이고 나머지 24명은 출근하지 않고 자택에서 근무하거나 명함만 갖고 다니는 비상근이다.

한나라당이 이처럼 1개 소대규모에 가까운 부대변인단을 임명한 것은 한 자리 줘야 할 사람은 많은데 감투는 모자라고 그래서 명함용 벼슬이라도 주자는 고육지책이라고 한다. 더 심하게 말하자면 당 대표나 최고위원 등 고위 당직자들이 선거에 많은 도움을 준 ‘식객’들에게 당장은 마땅한 자리가 없으니 대신 명함이나 찍으라고 만든 대외용 감투인 셈이다.

‘벼슬이 흔하면 천해진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제1야당의 부대변인이라면 이력서에 오르고도 남을 만한 감투다. 비록 당사에 출근하지 않는 비상근 부대변인이지만 총선이나 각종 선거에 출마할 때는 그 이력이 무시 못할 힘이 된다는 것이다. 당내 중간보스의 말만 믿고 부대변인이라도 한 자리 오지 않을까 기대했다가 탈락한 사람들이 허전해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 한나라당 부대변인 36명 -

그러나 이번에 임명한 부대변인단도 왕년에 비하면 많이 줄어든 것이라고 한다. 한나라당은 지난 2003년 8월에도 51명의 부대변인과 49명의 당 대표 특별 보좌관을 임명한 전력이 있다. 그때도 51명의 부대변인 중 9명을 제외한 42명은 보수도 사무실도 없는 ‘재야 비상근’ 부대변인이었고 대표 특별보좌관도 17명을 뺀 32명이 재택근무였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명함용 벼슬은 어제 오늘의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자식이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 심지어 증조부에게까지 벼슬을 내리던 증직(贈職)이나 부족한 나라 재정을 메운답시고 돈받고 팔았던 공명첩(空名帖)도 따지고보면 명함용 벼슬이었던 셈이다.

조선왕조 때의 증직규정은 4품에서 6품까지의 벼슬은 아버지에게, 3품은 할아버지까지, 그리고 2품은 증조부에게까지 벼슬을 추증할 수 있도록 했다. 따라서 족보나 비문에 올라 있는 관직 앞에 ‘증’이라는 글자가 있으면 자손 잘 두어서 얻은 명예직으로 보면 된다. 이조판서니 호조참판이니 하는 높은 벼슬도 증직의 경우 해당 관아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생을 마치는 일이 많았다.

공명첩 역시 ‘빌 공’ ‘이름 명’자 그대로 ‘아무개에게 무슨 벼슬을 내리노라’고 쓰고 이름을 써야 할 자리는 비워 놓은 일종의 백지 사령장이었다. 이 공명첩은 더러 약속어음 대신 쓰이기도 했다. 임금이 절에 지원금을 줄 때도 법주사에 몇 백장, 귀주사에 몇 백장 하는 식으로 돈대신 공명첩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돈많은 사람에게 재주껏 팔아서 절 살림에 보태 쓰라는 뜻이었다.

한나라당 부대변인 숫자는 집권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비해 5배나 많다고 하지만 ‘낙하산’이 없는 야당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집권당이라면 논공행상으로 ‘코드’가 맞는 사람이나 ‘당 발전에 기여한 동지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자리가 많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 낙하산을 띄울 처지가 안되는 야당으로서는 당직을 여러 개 만들어서 명함이나 찍게 하는 방법밖에는 달리 길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집권뒤 ‘코드인사’ 없을지… -

이처럼 무더기로 부대변인을 임명한 한나라당의 사정은 이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된다. 한나라당은 크고 작은 인사가 있을 때마다 코드인사니 낙하산인사니 해서 매섭게 비판해 왔다. 그러나 막상 한나라당이 집권했을 때 과연 코드인사나 낙하산인사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지금이야 ‘춥고 배고픈 야당’을 방패삼아 식객들의 불만을 달랠 수 있지만 집권한 뒤에는 그런 실속없는 자리로는 만족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부대변인뿐 아니라 급한 불 끈답시고 이런저런 당직을 남발했다가 자칫 당내에 더 큰 불만세력을 키우는 빌미가 되기 십상이다. ‘말타면 견마잡히고 싶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인지상정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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