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읽기

고통 끊긴 가정의 초라한 일상

이선민, ‘준훈이네’ 2000, 디지털 C-프린트

이선민, ‘준훈이네’ 2000, 디지털 C-프린트

이선민(1968년생)은 서른 살을 전후로 한국 가족과 가정을 소재로 한 사진작업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한 가정의 딸이며 며느리이고, 한 가족의 주부이며 엄마가 된 작가는 한국 여성이 가정에서 행하는 역할과 가족 속에서 겪는 심리적 정황을 통찰력 있게 연출하고 포착하는 작업에 매진한다. 특히 자신과 심리적·경제적 상황이 비슷한 30대 중산층 주부에 초점을 맞추어 변모하는 한국의 가족구조와 변화하는 가족의식을 카메라에 담았다.

최근 들어서는 봉건적 가족관, 전통적 대가족 의식이 잔존하는 제사와 차례의식 속에서 여성들의 역할과 가족 구성원들이 느끼는 심리적 양상을 보여주는 전시회 ‘여자의 집’을 개최했고, 또 한편으로는 가족생활의 패턴이 남성 가부장에서 주부와 자녀에게로 옮겨진 30대 중산층을 담은 ‘트윈즈(Twins)’라는 전시회를 열었다. 한 마디로 이선민의 주요작업은 모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아 전통적 가족의식의 해체,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한국의 가정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다.

이선민의 작업에서 높이 평가돼야 할 점은 무엇보다도 낯선 가족과의 친화력이다. 작가는 섭외한 가족의 생활공간에 카메라와 조명장치를 벌여 놓고 자신이 원하는 상황을 연출하거나, 그 상황을 은연중에 조정하지만 작가의 개입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섭외한 가족에 동화된 이선민의 카메라 앞에서 그 구성원들은 훈련된 배우들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일상을 연기한다. 작가의 낯선 시선을 개의치 않고 자신들의 삶을 가식 없이 보여준다. 그리하여 현재 우리가 그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가족의식, 가족 상호간의 심리적 갈등, 변모하는 가정의 구조가 꾸밈없이 표출된다.

세 자녀를 둔 부부 중 하나는 분명 화가일 것이다. 아빠는 둘째 딸이 그리는 그림을 막내딸을 감싸며 보고 있다. 우측에서 장남인 ‘준훈’은 공부를 하고 있고, 30대 주부는 홀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 조야한 작업실의 천장과 바닥, 그리고 값싼 석유난로와 허름한 가구는 ‘준훈이네’의 편치 않은 경제생활을 암시한다. 그리고 비좁은 화실에 함께 있는 가족은 각기 다른 세 방향을 향하고 있다. 두 딸과 아빠는 좌측 그림 쪽을 향하고, 아들은 우측에서 독서에 전념하고 있다. 엄마는 중앙 좌측을 망연자실 바라본다. 셋 모두는 각자에 몰두할 뿐 다른 가족들에 대해 무관심하다. 한 가정을 은밀히 지배하는 소통의 단절과 30대 주부를 엄습하는 권태가 신록의 그림들이 돋보이는 화실을 떠다닌다. 이선민의 가족사진은 언제나 이처럼, 이루어지지 않는 가족의 행복과 한 가정의 초라한 일상이 불현듯 우리 현실로서 다가오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

〈최봉림|사진비평가·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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