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을 잡고, 캔버스를 마주한 지 반세기가 넘어섰다. 원로 화가들의 붓에는 이제 기교가 없다. 그저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삶의 희로애락이 오롯하게 담겨있을 뿐이다. “지금도 붓을 놓으면 영 허전하다”는 작가들. 원로작가 정창섭(80), 이경순(79), 류병엽(69) 화백이 봄과 함께 우리곁을 찾았다. 인생을 통째로 담아낸 작품들과 함께.
정창섭 화백은 ‘그리지 않고 그려지는, 의도하지 않고 이뤄지는 세계’를 추구한다. “현재의 형태와 양식, 논리를 완전히 제거하고서야 작업을 시작하고” “모든 지식과 의도를 단념한 채 자유를 즐기고, 잊혀진 추억의 잔상들을 생각하며 닥종이 속에서 나 자신의 또다른 인식을 발견하는 것이 희망이요, 바람”이다. 그의 작품은 동양적 정서가 물씬 풍긴다. 화면 중앙의 여백은 보는 이를 명상에 들어서게 하고, 가장자리는 작가와 교감을 나눈 닥의 질감이 생생하다. 닥을 물에 불리고 수십번 주물러 캔버스에 올리는 작가는 때로 닥에 색을 입혀 독특한 미감을 자아낸다. 정화백은 서울대 출신으로 60년대엔 서구적인 앵포르멜(비정형)에, 70년대엔 동양적 감성에 주목해 한지와 먹을 사용했다. 80년대부터는 닥을 이용한 ‘묵고(默考)’ 연작을 선보여 주목받는다. 전시회에는 80년대 초기부터 근작까지 30여점이 출품됐다. 노환으로 최근 몸이 불편한 정화백은 그러나 5월엔 중국 베이징에서 작품전을 연다. 표갤러리(서울 이태원동)에서 4월28일까지. (02)543-7337
류병엽 화백의 전시장(갤러리 현대·서울 사간동)에 들어서면 가슴이 툭 트이고, 호쾌해지는 듯하다. 근래 화단에서 드물게 100~500호에 이르는 대작 40여점이 관객을 맞는다. 80년대 인기화가로 화단을 떠들썩하게 한 류화백은 미공개작 큰 그림들을 공개하며, “지난 삶을 되돌아 보고, 20여년간 그린 큰 그림들을 선보이고 싶었다”고 밝혔다. 작품들은 하나같이 산뜻하고, 명쾌한 인상이다. 강렬한 원색이 화사한 색감을 자랑하고, 구성은 아주 단순하다. 원색들이지만 “수번의 붓질로”눈에 부담은커녕 오히려 자연스레 스며든다. 아늑한 농촌 마을, 웅장하거나 야트막한 산, 성당, 그리고 소박한 사람들이 화면을 채운다. 고향같기도 하고, 잃어버린 낙원을 떠올리게 한다. 화면 속의 새는 희망의 상징이다. 홍익대 출신인 작가는 60년대 프랑스 유학 뒤에도 자신만의 길을 걸어왔다. 그는 “‘보통사람이 한번에 해내는 일을 나는 백번까지, 열번에 해내는 일은 천번이라도 노력해서 이룬다(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는 자세로 산다”고 전한다. 4~22일. (02)734-6111
한국 구상화단의 1세대 여성작가인 이경순 화백의 작품전 제목은 ‘花畵六十(화화육십)’.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일생을 꽃과 그림으로 살아온 작가를 대변한다. 이번 16번째 개인전에는 40여점이 출품된다. 갖가지 들꽃들, 장미와 분꽃·라일락 등이 때론 무더기로, 또 화병에 꽂힌 정물화로 다가온다. 은근한 아름다움이 절로 우러나온다. 작가는 노익장을 과시라도 하듯 새 작품세계도 선보인다. 꽃병을 창호지문이나 사방탁자, 궤 등 세월이 묻어나는 옛 기물들과 어울리게 해 감동을 전한다. 자연빛을 담아내는 창호지문 너머로는 산과 들판이 펼쳐지고, 화병과 탁자 등은 서로의 자리를 찾아 편안하다. 담백하고 기품이 넘치는 작품들이다. 요즘도 “하루 8~9시간은 붓을 들고 있다”는 작가는 “몸은 늙어가지만 작은 뜰에 앉아 그림을 그리다보면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된다”고 근황을 밝혔다. 이화백은 조기주 교수(단국대 서양화과)와 모녀 화가로도 유명하다. 4~13일 갤러리 예맥(서울 소격동). (02)720-9912
〈도재기기자 jaek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