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천경자를 떠올리면 곧바로 ‘꽃과 여인’이 나타난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에서 삶의 고통, 원죄의 굴레, 여인의 한(恨)을 읽어낸다. 또 슬픔, 화려함, 섬뜩함과 함께 몽환적 이미지가 묻어 나온다. 그렇다면 그의 실제 삶도 그랬을까? 그는 다복하지 않았다. 첫 결혼에 실패했고, 유부남과의 사랑은 그 끝이 비극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화가로서의 삶은 누구보다 윤이 났다. 각각의 표정이 살아있는 수십 마리의 뱀을 그린 ‘생태’(1952년작) 발표 이후 줄곧 화단의 한 복판에 서 있었다. 생전에 최고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내면에 쌓인 응어리와 격한 감정들을 화폭에 담아냄으로써 이를 씻어내렸을 것이다. 그는 치열하게 자신의 내면을 분출했다. 그렇게 자신을 해방시켰다. 그렇게 해서 그만의 세계를 구축했고, 사람들은 이를 ‘천경자 화풍’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그는 그림과 글 속에 자신을 스스럼없이 드러냈다. 자신을 연출할 줄 알았다.
1991년 ‘미인도’ 위작 시비는 천경자 개인뿐 아니라 한국 미술계에도 커다란 사건이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 작품을 소장하고 있던 국립현대미술관과 화랑협회는 진품이라고 결론 내린 것이다. 그는 “내가 낳은 자식을 내가 몰라보겠느냐”며 피를 토했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그는 졸지에 ‘자식도 알아보지 못하는 어미’가 되어 버렸다. 그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일체의 작품 발표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했다.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그의 나이 80세이던 2003년 뇌출혈로 쓰러졌다. 그는 뉴욕에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며 남은 삶을 가늘게 이어가고 있다.
천경자의 고향 고흥에 그의 전시관이 들어선다고 한다. 미술관이 아닌 45평 규모의 아담한 전시관으로 꾸며질 모양이다. 아마 그의 그림값이 너무 비싸고, 예산이 달려서 그런가 보다. 정이 많은 남도 여자. 남자에게 약했고, 욕을 감칠맛나게 잘하던 사람. 사투리를 구성지게 들려주던 화가, 천경자. 그의 그림 속 여인은 아직도 젊은데, 원색에서는 힘이 불끈 솟아나는데 그의 병듦이 안타깝다. 벌떡 일어나 말 많고 탈도 많은 작금의 화단에 욕 한사발 퍼부었으면 좋으련만. 그에게 창작 영감을 불어넣었던, 늘 그리워하던 고향에 그의 공간이 생겨난다니 그도 기뻐하리라.
〈김택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