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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영국 웨일스 헤이 온 와이

  • 글·사진 정진국 | 미술평론가

책마을 제국의 성채, 마음은 갈 곳 모르고…

마을에서 택시를 내리자마자 비바람을 피해 아무 집이나 뛰어들었다. 대낮인데도 전등을 켠 침침한 실내에서 카운터를 지키는 할머니의 인사를 받기도 전에 거대한 곰 인형과 마주쳤다. 조막만한 사자와 토끼 인형들도 드럼통을 채웠다. 층층이 쌓인 상상의 도시와 인물이 뒤엉킨 퍼즐그림상자들은 백화점 코너를 옮겨다 놓은 모습이었다. 동화책과 퍼즐만을 취급하는 집이다. 잠시 빗방울을 털며 걸리버가 있나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부스 캐슬의 안뜰에서 내다본 마을 거리의  표정.

부스 캐슬의 안뜰에서 내다본 마을 거리의 표정.

빗줄기가 잦아든 틈을 타 길 건너 종탑 밑 카페로 건너갔다. 문을 잡아당기자 울리는 종소리에 묻혀 바짝 구운 머핀의 고소한 탄내가 밀려들었다.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의 장작 냄새도 뒤섞여왔다. 그 옆에서 노인이 책을 읽고 있었다. 다리가 짧은 강아지가 바닥을 주름잡고 있는 사이, 두툼한 나무 탁자 뒤로 들여다보이는 주방에서 아주머니 둘이 과자 반죽을 하고 있었다.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창밖을 내다보니 꽤 먼 나라에 와 있는 기분이다. 유로를 쓰다가 파운드를 쓰니 그렇고, 지도상으로는 얼마 안 되는 거리인데도 열차의 계속되는 연착과 갈아타기 때문에도 그랬지만, 이 고장 사람들의 억양과 발음 때문이기도 했다.

표기는 사전을 따르고 있을망정 입에 올릴 때만큼은 어떤 표준어로도 흉내 낼 수 없는 자기네 모음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차라리 존경스러웠다. 곳곳에 병기된 웨일스어뿐만 아니다. 풍경까지 프랑스의 브르타뉴와 아주 흡사했다. 상수리나무와 겨울에도 촉촉하고 푸른 잔디와 키 작은 돌집, 물가에 늘어진 관목, 양떼들 곁에서 우아하게 거니는 조랑말이 그려내는 전원이다. 습지와 개울이 더욱 흘러넘치는 점만 다르다고 할까? 또 다른 점이 없지는 않다. 칙칙한 길가에서 금빛으로 반짝이는 ‘고어스‘라는 가시금작화는 유난히 애틋한 방점을 찍어나가며 풍경에 정감을 더한다.

부스 서점에 수집해 놓은 픽처 포스트 화보신문.

부스 서점에 수집해 놓은 픽처 포스트 화보신문.

비비람이 잔잔해져 밖으로 나오자 행인마다 애견을 동반하고 다닌다. 코요테를 닮은 커다란 놈부터 뒤뚱대는 테리어 종과 코코스파니엘, 달마시안 등 별의 별 개들이 다 활개를 치지만, 주둥이를 봉하지 않은 채 끌려 다니는 불독은 그렇게 반갑지만은 않다. 아무튼 짐승과 다정하게 지내는 주민의 사랑이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찻잔이나 접시에서 늘 개털에 놀라게 되는 부산한 긴장을 풀 수 없다는 점이다.

마을 어디에서나 높이 올려다 보이는 성채는 문고판 추리소설의 표지를 장식하는 다 허물어지다시피한 망루였다. 사진을 통해서도 널리 알려진 성문의 안뜰로 들어서자 시즌이 아닌지라 텅 빈 서가들이 벽에 기대서 있고, 버려진 책 몇 권이 비를 맞고 있다. 마을 아래로 흐르는 와이 강을 바라보면서 성채 주변에서 좌우로, 지그재그로 펼쳐지는 골목으로 한두 집 서점, 그 다음은 옷가게나 상점, 그 다음 집은 ‘팝’, 그 다음은 ‘비 앤 비‘ 민박집, 그 이웃은 다시 서점… 그런 식이다. 이렇게 반경 200여 안에 서른 군데 가까운 서점이 빼곡하다.

영국 풍경화집의 훌륭한 디자인을 보여준  존 컨스타블의 화집이 보인다.

영국 풍경화집의 훌륭한 디자인을 보여준 존 컨스타블의 화집이 보인다.

1962년에 리처드 부스의 주도로 세계 최초의 책마을을 선언하고 나선 뒤로 그 종주국으로서 위상을 높여온 이 책의 왕국은 책을 주제로 한 관광촌의 전형이 되었다. 방문객은 봄가을의 축제와 성수기에 비해 겨울에는 거의 10분의 1수준이다. 그러나 겨울에 찾는 사람들이 더 진지한 고객이고, 우편 판매의 비중이 크니까 계절의 차이는 그렇게 심하지 않다고 한다. 성채와 별도로 ‘마켓 스트리트’ 골목에 자리 잡은 부스가 창업했던 가게는 검은 철골과 목조로 틀을 삼고 박공을 올려 언뜻 보기에는 파리, 바스티유에 있는 디자이너 장 폴 고티에 매장의 축소판이다. 지상 3층과 지하를 합쳐 40만 권을 수용한다는 자랑처럼 연면적이 300평은 넘어 보였다.

구석방을 찾아들자 발송을 전담하는 방에 포장용 상자가 그득하다. 천장 밑에 붙여 놓은 세계지도가 그 제국적 규모를 과시하고 있다. 한 모퉁이에 사진화보 ‘픽처 포스트’지가 연대별로 분류되어 있었다. 부스의 손에서 얼마나 더 고평가될지 아무도 알 수없는 노릇이다. 아무튼 이 왕은 출타중이어서 만날 수 없었다. 최근에는 아프리카 말리의 팀부쿠 마을에 제2의 책마을을 조성하면서 더욱 활동 폭을 넓히느라 분주하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말리는 대통령과 측근이 문화부흥에 적극적이어서 최근 미술과 사진 분야에서 괄목할 활약을 펼치고 있다. 다른 아프리카 나라들이 영화와 스포츠에서 약진하는 것을 만회하려는 정책이다. 이 주역들이 주로 친 프랑스 계열인 불어권 나라인데 그 틈으로 파고들어간 부스의 수완이 대단하다. 사하라 이남의 영어권 시장을 겨냥한 전초기지로서 삼았을 법하다. 어쨌든 그가 말리의 문화적 역동성과 젊은 가능성을 간과하지 않았다는 점이 놀랍다. 부스는 세계지도상에서 책마을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으려 하는 만큼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잦다. 조만간 만나게 되지 않을까.

1층과 2층은 역사와 문학, 학술서 코너가, 지하층은 가벼운 읽을거리가 차지한다. 다니엘 데포, 스티븐슨으로 이어지는 우리의 소년시절을 사로잡았던 걸작이 수북하고, 리처드슨처럼 고전적인 작가의 원본은 입을 딱 벌어지게 할 만큼 값이 나간다. 그러나 최근에 발간된 역사서들도 8·9판을 넘겨 찍으며 반세기 넘게 속간되었고, 보수적인 고전과 나란히 진보 성향의 신식민주의를 다룬 서적도 여러 판을 거듭하는 모습은 부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아시아·아프리카 지식인들이 쓴 수많은 ‘영어책’을 탐독하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면 더욱 흥분할 만하지 않았을까. 검소한 형태로 빼어난 기록문학과 사진의 새 차원을 연 펭귄 사의 정기간행물 ‘그란타’의 과월호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이 책갈피 속에서도 아시아·아프리카 사람과 삶을 바라보는 완곡하게 세련된 냉소와 방관자의 시선은 여전하다. 선정성이 어느덧 사진의 본질 비슷해진 탓은 아닐까.

양서점’의 올리브 쿠크.

양서점’의 올리브 쿠크.

그런데 워낙 명성이 대단해서 그럴까, 아니면 유통이 활발해서 물건이 즉시 빠지기 때문일까. 적어도 미술사나 화집, 앨범 같은 것은 의외로 썰렁하다. 너무나 중쇄를 거듭한 나머지 어느 집에서나 없으면 이상할 정도로 흔해져버린 파이돈 출판사 등에서 펴낸 대중적 역사서들이 간간이 보일 뿐이다. 물론 5세대를 이어온 롱맨 출판사가 예전에 발간한 책들도 풍부하다. 1869년 윌리엄 롱맨이 지은 ‘성 바울에 바친 런던의 대성당 3채’처럼 독창적인 책도 보인다.

스페인 내전에서 6·25전쟁에 이르는 냉전기에 현장 속에 뛰어들어 치열하게 살았던 체험담은 지금은 헐값에 거래되고 있다. 때로는 스파이와 변절자로, 때로는 영원한 추방자로 갈팡질팡하면서 질곡 속에 살면서도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사람들의 진솔한 고백록이다. 이념을 넘어 실패와 좌절과 자기부정의 쓰라림에서 나온 인간적 기록이다. 특이한 형태로 운영되던 독자 연합에서 펴낸 책자에서 이런 증언이 풍부하다. 하지만 1940년에 나치의 런던 대공습과 나란히, 동구권에서 독어를 사용하던 유대인 집단이 영국 출판계에 대거 정착하면서 출판의 지형도 급격히 바뀌었고 혼란스레 판권이 이동하고 음모와 계략도 넘쳤다.

이 전후 혈투의 시대에 살아남은 출판사들은 이미 18세기부터도 끔찍한 환경이던 영국 출판계를 더욱 각박하고 비정하게 만들었다. 여기에서 살아남은 자의 미소는 파렴치한 술수를 감추는 씁쓸한 것일 수밖에 없다. 이들 또한 기존에 잘 나가던 출판사에서 펴낸 고전적 번역서, 즉 네덜란드어·불어·독어판을 해적질하다시피 제목을 바뀌고 역자를 바꾸어 다시 내곤 했고, 여기에 맞서 미국의 대학출판부 등에서 새 번역판을 내놓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특히 대중성이 높은 르네상스를 둘러싼 인물전기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더 헤이 북 컴퍼니에서는 쪽문으로 통하는 창고에서 골동품도 함께 취급한다.

더 헤이 북 컴퍼니에서는 쪽문으로 통하는 창고에서 골동품도 함께 취급한다.

이런 대형 출판사가 일찍부터 인도의 잉크, 홍콩의 노동력 등으로 경영을 국제화하고서 지식산업의 꽃이라는 출판시장을 쥐고 흔들게 되면서 우리의 출판사와 독자 또한 적지 않게 예속된 꼴이다. 잘 찾아보면 적은 저작권료를 내고도 펴낼 수 있는 것을 대형이나 권위에 주눅이 들고 또 경쟁심에 휘말려 바가지를 쓰는 경우가 없지 않을 것이다.

서점별로 취급하는 장르의 차이가 대단하지는 않다. 하지만 도매서적상이 있고 제본소와 레코드 전문점이 있는 점은 특이하다. 그 중에서 성채의 뒤안길에 박혀 있는 ‘마리야나 드보르스키’ 서점은 사라질 위기에 처한 수백 종의 언어를 다룬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영화책 방 문 앞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영화 책방이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과연 크다. 하지만 거창한 스타를 내세운 화보집은 덤핑물이 대부분이고 알짜배기야 이미 런던의 고서적상 등으로 팔려나갔을지 모른다.

추리소설의 명작들을 고루 갖춘 ‘머더 앤 메이험’ 서점. 수수께끼 같은 실내장식 사이로 아가사 크리스티, 파트리샤 하이스미스 등의 추리물이 넘친다.

추리소설의 명작들을 고루 갖춘 ‘머더 앤 메이험’ 서점. 수수께끼 같은 실내장식 사이로 아가사 크리스티, 파트리샤 하이스미스 등의 추리물이 넘친다.

리처드 부스 폐하의 성전 앞 모퉁이에 도전장을 낸 듯 작은 ‘양서점(良書店)’이 짭짤하다. 주인은 쾌활하고 잘 생긴 토박이 청년 올리브 쿠크. 올리브는 이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책방 사이에서 뛰놀며 컸기 때문에 그의 꿈이었던 지금 생활에 대만족이다. 미래에 대해서는 완전히 낙관했다. 대륙의 마을들을 돌아보며 ‘왕’(부스)의 비리 소문을 챙겼노라고 그의 장기집권에 들고 일어나야 하지 않겠느냐고 농담을 던지자, 대관식에 초청하겠노라고 응수하는 표정이 귀여웠다. 이 집 창가에 멋진 책 한 권이 나와 있었다. 화가 존 컨스타블의 ‘영국 풍경화첩’이다. 한 세기 이상 출판사들이 다양한 이본을 펴내며 그의 그림과 일기와 편지로서 또 다른 걸작을 빚어내려 고심한 결과였다.

이탈리아라는 색안경을 벗어던지고 수천 년간 천하를 덮었던 신화를 벗겨내고서, 쟁기로 밭을 가는 사람이 사는 자연으로 돌아왔던 컨스타블이다. 그는 자연 속에서 우마와 양떼, 거위, 물고기와 더불어 사는 당대인을 그렸다. 이렇게 사람이 사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찾아낸 화가가 그린 비취빛 하늘과 황토를 앞에 두고서 출판사들이 흙탕물을 끼얹곤 했던 것은 당연지사 아닐까. 1985년 존 머레이 출판사 판의 시원한 판형에 본문을 3단으로 짠, 실용적인 영국인의 기질을 상기시키는 책이다. 이 책은 그 디자인에 저작권을 붙였다는 점에서도 기억할 만한 사건이 되었다.

[유럽의 책마을을 가다](21)영국 웨일스 헤이 온 와이

어쨌든 출판관광으로 완전히 자족하는 이 마을에서 보낸 하루는 아주 잘 짜인 한 편의 ‘트릭’속에 빠졌던 날이었다. 마주치던 노인은 발걸음을 멈추고 손을 맞잡으며, “헤이 온 와이를 즐기고 가시게”라고 덕담을 던지곤 했다. 제법 그럴싸한 책을 진열장에 내세운 ‘더 북숍’ 앞에서 입맛을 다시며 어정대고 있자니 점심을 차려주었던 식당 아주머니가 지나가다가 한 마디 던졌는데 그 참 걸작이었다. “아니 여기서 돈 다 쓰고 갈 참이구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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