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파트에 사는 한 친구가 가끔 그곳 주민들이 입지 않고 내다버리는 옷들을 수거해 와 주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친구가 가지고 오는 옷들은 흔히 말하는 명품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브랜드 중에서는 꽤 비싼 제품들이다. 나로서는 가격 세일을 할 때가 아니면 살 엄두도 못 내는 옷들이 상표도 떼지 않은 채 버려진다는 사실이 늘 놀랍다.
황희 정승의 아내와 딸들이 제대로 된 치마 하나가 없어 힘들게 장만한 하나를 가지고 서로 번갈아 입으며 손님에게 나가 인사를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생각난다. 지금 같으면 청승맞다고 혀를 내두를 그들의 모습은 청빈하면 당연히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시대상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황희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 임진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반구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갈매기를 친구 삼아 노년을 보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정자 아래로는 유유히 임진강이 흘러가고 있다. 그러나 강에는 오래도록 철조망이 쳐져 있고, 군인들이 경비를 서는 초소가 정자와 잇대어 있다. 철조망을 걷어내고 아름다운 노을빛에 흠뻑 젖어 형이상학적인 삶을 생각하며 걸어볼 수 있는 날이 언제쯤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