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성장한 곳에서는 메밀꽃을 보지 못했다. 상사화도 꽃무릇도 목백일홍도 동백꽃도 보지 못했다. 여행을 하면서 나는 그 꽃들과 마주치곤 했다.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고 얼마 되지 않아 찾아갔던 송광사 대웅전 앞에서 깡마른 노승의 몸을 연상시키는 배롱나무를 처음 봤을 때, 나는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스님에게 이름을 물었다. 나무는 넘치지 않을 만큼 붉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스님은 아무 감정도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끝내 보지 못했거나 그보다 훨씬 늦게 알았을 여러 꽃들은 돌아오면 일기에 세세히 기록되었다. 꽃을 좋아하면 나이가 든 거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렇다면 나는 너무 일찍 늙어버린 사람이다. 한때는 농부였던 나의 아버지도 엉망인 농사 솜씨로 꽃 하나는 기막히게 키워 가족을 먹여살려야 할 가장으로서의 자질을 의심받곤 했다. 메밀꽃이 한창인 날, 나는 친구들과 떼지어 봉평으로 몰려갔다. 그곳의 땅기운은 서늘했고, 어느 길로 접어들어도 하얀 꽃밭이 펼쳐졌다. 꽃에 취했기 때문일까. 자정 넘어 출발해 돌아오는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밤안개의 입자에서도 메밀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