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 저녁 무렵, 잠시 모습을 나타낸 태양은 붉은 기라곤 없는 창백한 빛이었다. 우산 대신 카메라를 손에 들고 서서 먼 바다의 섬을 바라봤다. 섬들은 쓸쓸해 보이는 한편 평화롭게도 느껴졌다.
오래도록 꼼짝 않고 서서 섬과 바다와 하늘이 한 빛깔인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 반대급부의 풍경들이 떠올랐다. 너무 환해 아무것도 가늠할 수 없거나 너무 캄캄해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었던 풍경들. 실제보다 더 힘이 느껴졌던 풍경들. 잇달아 눈앞으로 선한 것과 악한 것의 차이를 전혀 느끼지 못하던 사람들도 떠올랐다. 맥락 없이 관대했고, 너그러워야 할 때 화를 냈던 사람들. 하늘과 땅의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던 사람들….
경계를 넘어서는 의식과 경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의식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른 것이다. 온 힘을 다해 경계를 허물며 높은 경지에 도달하는 의식과는 달리 경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의식이 일으키는 해악은 크다. 신경정신과에서도 경계장애라는 병명이 있을 정도이니….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도 강박증이 있는 사람처럼 악착같이 모든 존재의 경계점을 찾고 있는 나는 대체 어느 부류에 속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