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간→복간→강제매각→독립언론 ‘격랑의 기록’

손제민기자

→ 경향신문, 해방이후의 역사를 증언하다

2만호를 내기까지 경향신문의 역사는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의 격랑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정간과 폐간, 복간, 강제매각, 그리고 통폐합 등으로 점철된 경향신문의 숨가쁜 역사는 한국 현대사의 현장에 밀착해 지체 없이 사실을 전달하고, 논평을 내놓아야 하는 언론의 숙명을 고려하면 차라리 필연에 가까웠다. 일개 언론사의 사사(社史) 자체가 해방 후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증언한 경우도 드물 것이다. 그래서 ‘한국 현대사로서의 경향신문 역사’이다.

1 창간호 제작 후 소공동 사옥 앞 기념촬영.<br />2 4·19 혁명 직후 경향신문이 복간되자 기뻐하는 시민들.<br />3 복간된 경향신문을 들고 달려나오는 판매소년들.<br />4 경향신문 강제매각 사실을 전한 본지 사회면.<br />5 삼분 폭리 사건을 보도한 기사.<br />6 독립언론 경향신문 사원주주회 출범식.<br />7 미국산 쇠고기반대 촛불시위 당시 경향신문 앞을 지나는 시민들.

1 창간호 제작 후 소공동 사옥 앞 기념촬영.
2 4·19 혁명 직후 경향신문이 복간되자 기뻐하는 시민들.
3 복간된 경향신문을 들고 달려나오는 판매소년들.
4 경향신문 강제매각 사실을 전한 본지 사회면.
5 삼분 폭리 사건을 보도한 기사.
6 독립언론 경향신문 사원주주회 출범식.
7 미국산 쇠고기반대 촛불시위 당시 경향신문 앞을 지나는 시민들.

# 창간가톨릭교회에 의해 태어난 경향신문은 해방 후 서울에서 창간된 최초의 종합일간지다. 당시 언론 환경은 우익지와 좌익지로 갈라져 있는 상황. 창간호 1면을 채운 것은 언론인 배성룡의 ‘좌우합작의 전망’이라는 칼럼이다. 좌우합작과 미·소공위의 원만한 타결을 통한 민족통일을 염원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경향신문은 좌·우익에 의해 각각 ‘앞잡이 신문’ ‘빨갱이 신문’이라고 비판받았다. 3만부 발행으로 시작한 경향신문은 1년 만에 6만2000부로 발행 부수가 늘어 다른 신문들을 제쳤다.

# 강제 폐간경향신문과 정권의 관계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부산 피란 시절인 1952년 5·26 부산 정치파동을 시작으로 발췌개헌안 통과까지 자유당 독재가 굳어지자 이승만 정권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 58년 2·4 보안법 파동을 거치며 논조는 더욱 날카로워졌다. 결정적으로 논설위원 주요한이 59년 2월4일자에 쓴 여적(餘滴)이 문제가 돼 폐간에 이르렀다. 이른바 ‘여적 필화 사건’이다. 당시 ‘여적’은 경향신문이 연재했던 논문 중 하나인 페르디난드 허멘스 미국 노트르담대 교수의 ‘다수결의 원칙과 윤리’에 대한 단평이었다. ‘투표자가 권력에 눌려 자유롭게 자기 의사를 행사할 수 없는 환경이라면 다수결 원칙의 근거는 붕괴되고 진정한 다수가 힘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은 폭력에 의한 혁명이 될 수도 있으니 위기의 본질을 대국적으로 인식하라’는 것이 요지였다. 하지만 정권은 이 글이 선거제도를 부정하고 폭동을 선동했다며 폐간령을 내렸다. 지령 4325호였다.

[지령 20000호 특집]폐간→복간→강제매각→독립언론 ‘격랑의 기록’

# 복간폐간 1년 후 4·19 혁명이 일어나 경향신문은 복간됐다. 4월26일 오전 이승만 전 대통령이 전격 하야성명을 발표한 지 몇 시간 뒤였다. 복간호 1면 머리기사의 제목은 “반독재 혁명은 개가를 올리다! 국회, 이 대통령 하야를 결의”였다. 젊은 학생들의 피를 딛고 얻어낸 복간이었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사상과 의견이 자유롭게 표출될 수 있는 장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그 기간은 너무 짧았다. 5·16 쿠데타가 일어나면서다.

# 강제매각쿠데타 이후 경향신문은 가톨릭교회 소유 신문에서 주식회사로 전환됐다. 경향신문은 박정희 정권 초기에도 비판적인 논조를 유지했다. 삼성 등 재벌 기업들의 삼분(三紛·설탕, 밀가루, 시멘트) 폭리 사건을 집중 파헤치고, ‘허기진 군상’ 시리즈로 어려운 서민 삶을 보도해 독자들의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 특히 ‘허기진 군상’ 시리즈는 박 전 대통령을 가장 분노하게 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삼분 폭리 사건 보도 후 삼성은 경향신문을 검찰에 고소해 사장, 편집인, 정치부장 등이 기소됐다.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를 진압하기 위한 6·3 계엄 선포로 ‘허기진 군상’ 시리즈도 중단됐다. 이후 사장과 기자들이 강제연행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이 기사들이 북한을 이롭게 했다는 이유였다. 이후 박 정권은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언론윤리위법을 제정했고, 경향신문은 언론탄압이라며 비판했다. 경향신문은 66년 1월 은행부채 4600만원을 갚지 않았다는 이유로 언론 사상 처음으로 법원 경매에 올랐다. 당시 다른 신문사들의 은행빚이 대개 1억원 이상이었고, 언론사 대출금에 대해서는 상환일을 연기해주는 게 관례였음을 감안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때문임은 누구나 짐작 가능했다. 경향신문은 법원 경매에서 부실기업인 기아산업에 낙찰된 뒤, 신진자동차를 거쳐 74년 문화방송에 인수됐다. 당시 문화방송은 정수장학회가 대주주였다. 40년이 지나 국정원과거사진실규명위는 경향신문 강제 매각이 비판언론을 탄압하려는 박 전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추진, 실행됐음을 확인했다. 이 사건으로 경향신문은 야성(野性)을 상실했다.

# 통폐합, 소각(燒却)신군부의 언론통제책인 언론 통폐합으로 경향신문은 80년 겨울 신아일보를 흡수했다. 신군부는 이어 언론기업 겸영 금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언론기본법을 마련했고, 경향신문은 문화방송에서 분리돼 사단법인이 됐다. 친여 기관지로서의 명맥은 87년 6월항쟁의 한복판까지 이어졌다. 6월19일 경향신문의 반 민주적 논조에 분노한 시위 군중이 지방 배송을 위해 서울역 앞에 쌓여 있던 경향신문을 소각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경향신문 기자들은 언론자유선언문을 채택하며 민주언론으로 거듭나는 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 재벌신문, 독립언론경향신문의 어려운 시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경향신문은 90년 8월 한화그룹에 인수됐다. 민주화의 열매를 주로 자본이 가져가버린 한국사회 전반의 현실과 묘하게 일치한다. 한화그룹의 물량 공세 속에 경향신문은 언론 기업으로서 큰 성장을 이루었지만, 박정희 정권의 강제매각 이후 잃어버린 정론지로서의 모습을 되찾지는 못했다. 대체로 자본의 이해에 충실한 재벌신문을 벗어나지 못하던 경향신문은 97년 외환위기로 한화그룹이 구조조정을 실시하며 98년 4월1일 종업원이 소유하는 사원주주회사, 즉 독립언론으로 거듭나 오늘에 이른다. 경향신문이 3만호를 맞을 때에 오늘의 경향신문이 어떻게 평가될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2만호까지 발행하며 겪었던 순탄치 않은 역사가 오늘의 경향신문을 만들었다는 점이며, 우리는 모두 지난 역사 속에서 오늘 어떻게 해야 할지 배운다는 사실이다.


Today`s HOT
중국 선저우 18호 우주비행사 가자지구 억류 인질 석방하라 지진에 기울어진 대만 호텔 개전 200일, 침묵시위
화려한 의상 입고 자전거 타는 마닐라 주민들 경찰과 충돌하는 볼리비아 교사 시위대
사해 근처 사막에 있는 탄도미사일 잔해 황폐해진 칸 유니스
지구의 날 맞아 쓰레기 줍는 봉사자들 한국에 1-0으로 패한 일본 폭우 내린 중국 광둥성 교내에 시위 텐트 친 컬럼비아대학 학생들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