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0여명 청진항 향해 출발
1959년 12월14일 일본 니가타 항구. 재일 한국인 2900여명이 찬 바람을 헤치며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가족, 친구들과 눈물의 작별이 이어졌고 여객선은 북한 청진항을 향해 물살을 갈랐다. 재일 한국인 북송사업이 첫 번째 닻을 올린 것이다.
재일 한국인을 북한으로 보내는 북송사업의 발단은 한 재일 한국인 청년의 편지에서 비롯됐다. 이 청년은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58년 김일성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먹고 살 수 있도록 귀국을 허락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김 주석은 곧바로 긍정적인 답장을 보냈고, 이후 북송사업은 현실화됐다.
북송선을 탄 상당수는 일본 사회의 차별과 냉대에 절망한 사람들이었다. 10대 시절 북한행을 결심했다 포기한 재일 인권운동가 신숙옥씨는 그의 책에서 “북의 상황을 알고 있어도 그것을 부정하는 마음이 들게 할 정도로 차별의 현실은 가혹했다”고 말한 바 있다. 가난도 북한행을 선택하게 한 동기였다. 5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은 극심한 불황에 시달렸다. 55년부터 1년여간 일본 정부는 재일 한국인 6만여명의 생활보호급여를 삭감하거나 아예 지급을 취소했다. 일본 사회와 정부의 냉대는 불황기 재일 한국인의 생활을 극도로 피폐하게 만들었다.
북송사업에 대한 일본 정치권과 언론의 반응은 옹호 일변도였다. 북·일 적십자사가 북송 협정을 체결했을 때 일본 사회당은 “이데올로기 문제가 아니다. 인도주의라는 입장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논평했다. 자민당도 “동감한다”며 맞장구를 쳤다. 언론 역시 너나 없이 ‘인도주의’를 내세우며 북송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폈다. 비판적인 보도는 드물었다. 결국 차별과 가난이라는 재일 한국인의 근본적 문제는 외면됐다. 이 같은 정치·경제·사회적 분위기는 재일 한국인을 북송이라는 막다른 선택으로 내몰았다.
북송사업은 모두 9만3339명의 재일 한국인과 그 일본인 가족을 북으로 보낸 뒤 84년 마침표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