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외화벌이’ 15년 역사 첫발
“1965년부터 10년간 그들이 고국(한국)에 송금한 외화는 모두 1억153만달러로 수출 총액 대비 1.6∼1.9%에 달했다. 하지만 그들이 한국의 경제발전과 해외진출에 상당한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기록이나 평가가 너무 소홀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지난해 하반기 조사보고서 내용 중 일부다. 여기서 ‘그들’은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일컫는다.
63년 12월21일 김포공항에서 건장한 남자 123명이 에어프랑스 여객기에 탑승했다. 얼굴에는 두려움과 설렘이 뒤섞인 표정이 역력했다. 여객기는 독일 루르를 향해 이륙했다. 광부의 독일 파견이라는 15년 역사가 첫 발을 내디디는 순간이었다.
파독 광부는 자의반 타의반 외화벌이 최전선에 섰던 사람들이다. 63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0달러였고, 실업률은 8%를 웃돌았다. 궁핍이 일상화된 시대였다. 가난에 허덕이던 서민들은 비상구가 절실했다. 또한 당시는 개발독재시대라 불리던 때였다. 정부로서는 경제성장의 밑거름으로 삼을 인적 자원의 수출이 필요했다. 이 두 가지 필요에 의해 광부의 독일 파견은 기획됐고, 77년까지 이어졌다.
정부는 신문에 광고를 실어 파독 대상자를 모집했다. 언론은 광부 파견을 애국심과 연관시키며 국민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시간외 수당에 호텔 부럽잖은 숙소’ 같은 헤드라인이 달린 독일 탄광 르포기사가 줄을 이었다. 시민들의 호응은 컸다. 첫해 모집 결과 경쟁률이 8 대 1을 기록했고, 대학 문턱을 밟아본 적 있는 사람이 다섯명에 한명 꼴이었다.
하지만 광부들의 독일 생활은 힘겨웠다. 매일 지하 수백m 갱도에서 탄가루를 마셔가며 9~10시간 일해야 했다.
채굴장비는 한국인 체형에 맞지 않아 다치기 일쑤였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타향살이의 서글픔이었다.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고, 낯선 땅에서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것은 향수병 그 이상의 고역이었다. 탄광사고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매몰돼 죽거나 탄차에 치여 사망하는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얼마 전 파독 광부 기념관이 독일 에센에서 개관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 기념관은 파독 광부들의 40여년 역사를 생생히 보여준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건립된 이 기념관은 파독 광부들의 오랜 염원이었다니 축하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