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익의 숙원, 군국주의 회귀 논란 촉발
히노마루와 기미가요가 각각 일본의 국기, 국가로 법적 지위를 얻은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히노마루와 기미가요는 1999년 8월9일 일본 참의원에서 ‘국기 및 국가에 관한 법률’이 가결되면서 국기와 국가로 규정됐다. 이전까지 이 둘은 일본인에게 심리적 차원에서만 국기·국가였을 뿐이다.
국기·국가법 입법 추진은 99년 초 히로시마의 한 고교 교장 자살사건으로 촉발됐다. 이 교장은 졸업식에서 히노마루의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을 지시했지만 교사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자민당을 비롯한 우익세력은 기다렸다는 듯 국기·국가법 제정을 공론화했다. 그동안 물밑에서 추진돼오던 우익의 ‘숙원 사업’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는 당시 일본 사회의 우경화 흐름에 힘입은 것이기도 하다.
법안 상정은 집권 자민당이 주도했다. 사회당과 공산당은 법안에 반기를 들었다. 군국주의 시대를 연상케 한다는 것이 가장 큰 반대 이유였다. 기미가요의 ‘기미(君)’가 누구를 지칭하느냐에 대한 논쟁이 일었을 때 오부치 게이조 총리는 ‘일왕’을 가리킨다고 일갈했다. 입법 과정 내내 군국주의 회귀 논란에 휩싸였다.
제1야당 민주당은 모호한 입장을 취했다. 당 내부에서 찬반이 엇갈린 것이다. 간 나오토 대표는 찬성한 반면 하토야마 유키오 간사장은 사회분열을 조장한다며 부정적 태도를 견지했다. 민주당은 결국 기미가요를 인정하지 않는 대신 히노마루는 국기로 인정하는 수정안을 냈지만 채택되지 않았다.
법안은 속전속결로 처리됐다. 오부치 총리의 법제화 지시 이후 참의원 통과까지 5개월가량 걸렸을 뿐이다. 일본 교원노조와 한국 등 주변국들의 반대 목소리는 거의 무시되었다.
일본 패전 후 잠깐 금지된 몇 년을 빼곤 히노마루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은 ‘권장사항’이었다. 개인 양심에 맡긴 것이다. 하지만 법률이 제정됨으로써 일 정부는 이를 ‘강제’할 근거를 얻게 됐다. 하지만 법 제정 이후로도 국기·국가의례를 거부해 갈등을 빚는 경우가 끊이지 않았다. 종교적 신념 외에 군국주의에 대한 반감이 의례 거부의 핵심적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