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신라시대 회화에 흥분
황남빵으로 유명한 경상북도 경주 황남동에는 왕릉을 비롯해 많은 신라시대 무덤이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것이 98호 고분(황남대총)이다. 1970년대 초 ‘경주 관광개발 10개년 계획’을 세운 정부는 98호 고분을 발굴해 주요 관광자원으로 삼고자 했다. 그런데 큰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다. 당시까지 한국 고고학계는 단 한 차례도 신라시대 고분을 발굴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학계와 당국은 고민 끝에 ‘모의 발굴’을 통해 노하우를 얻자는 결론을 내렸다. 규모가 작은 155호 고분이 시험용 발굴장소로 낙점됐다.
73년 4월 초순 문화재관리국 지휘 아래 155호 고분 발굴이 시작됐다. 155호 고분은 내부를 드러낼수록 세상을 놀라게 했다. 신라 조형미술의 극치라는 찬사를 얻은 금관 등 귀중한 유물 수백점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다 발굴 막바지 무렵인 8월23일 천마도가 그려진 말다래(옷에 흙이 묻지 않도록 말에 단 장식품)가 출토되자 세상은 다시 놀랐다. 말다래는 1500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으면서도 썩지 않았고, 하늘로 비상하는 말을 형상화한 천마도는 어제 그린 듯 선명했다.
천마도 말다래는 햇빛과 공기가 닿지 않도록 응급처치를 받은 후 조심스럽게 서울로 옮겨졌다. 자칫 햇빛에 노출되면 천마도의 색이 바래는 등 손상될 소지가 컸기 때문이다. 국립박물관으로 이송된 천마도는 보존작업을 거쳐 햇빛이 들지 않는 수장고에 보관됐다. 천마도는 발굴 이튿날 발굴 소식과 함께 그 사진이 각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신라 미술을 접한 사람들은 흥분과 감탄을 가누지 못했다. 신라시대 회화로는 천마도가 유일했다. 천마도는 누가 보더라도 국보감이었다.
155호 고분 발굴이 끝나도 누구의 무덤인지 말해줄 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155호 고분은 결국 천마도를 좇아 천마총이라 이름 붙여졌다. 하지만 ‘경주 김씨들’은 김씨 성을 가진 왕의 무덤일지 모르는데 말의 무덤으로 부르는 게 말이 되느냐며 항변했다. 이들은 81년 국회에 개명 청원서까지 냈지만 원하는 바를 이루지는 못했다.
천마총은 80년대 이후 불국사, 첨성대, 석굴암 등과 함께 경주 수학여행의 필수 코스로 굳어졌고 신라 고분의 대명사 격이 됐다. 최근에는 천마도의 그림이 기린이라는 주장이 제기돼 주목을 끌었다. 2009년 적외선 사진촬영으로 머리에 달린 뿔이 선명히 포착되면서 기린 논쟁이 다시 불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