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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 도서 3700권 기증한 이난영 전 국립경주박물관장

입력 2010.08.24 21:11

“금속공예·동경 등 국내 처음 손대며 손때 묻힌 책이니 의미 있을 거예요”

“박물관들 지금 전시가 너무 많아요…학예사가 유물 공부 충분히 한 후 전시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줬으면”

햇볕 쨍쨍한 날이었지만 이난영 전 국립경주박물관장(77·사진)은 경주 황성동 자택의 창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야구 중계를 보던 이 전 관장이 TV를 껐다.

소장 도서 3700권 기증한 이난영 전 국립경주박물관장

“20여년간 곰팡이 알레르기를 앓았어요. 그게 잠복기가 10년이야. 그 뒤에 20여년을 가려워서 긁고 살았다고. 그러다가 7년간 백신 맞고 면역력이 생길 때가 되니 박물관을 나오게 됐어(웃음). 그래도 햇볕을 쬐면 따가워서 이렇게 집에서 야구나 보고 있어요.”

여성 최초의 학예사·고고학자·국립박물관장 등 이난영 전 관장의 이름 앞에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녔다. 한국 박물관사의 산증인으로 문화재 보호에 앞장섰으며, 신라 토우와 동경(銅鏡), 박물관학 등 연구가 미진하던 분야의 기초를 닦아놓은 그가 지난달 손때 묻은 책 3700여권을 국립경주박물관에 기증했다. 이제 편히 여생을 쉬면서 보내겠다는 작정으로 말이다.

“언젠가는 정리해야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평소에 책 좀 마음대로 사보게 돈이 좀 많았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맘놓고 산 책이 아니라 아쉬워하며 산 책들이다보니 부끄럽지요. 그래도 금속공예나 동경 등 제가 우리나라에선 처음 공부를 시작하며 본 책들이니 의미는 있다고 생각해요. 또 친구이자 선생님이던 금속공예 연구의 대가 나가노 마사키(中野政樹)가 2007~2008년 두 차례에 걸쳐 국립경주박물관에 책을 기증했는데, 나도 나중에 내 책을 기증해 서로 합치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두 사람의 책을 합하면 금속공예, 동경에 관해서는 국내에서 좋은 장서가 될 거라고 생각했죠.”

이 전 관장보다 앞서 책을 기증한 나가노 마사키는 올 봄 별세했다. 일본에 갈 때마다 자신의 연구실에 있는 책들을 아낌없이 내주던 벗이 세상을 떴다는 소식에 한동안 힘들었다는 이 전 관장은 평생 보던 책을 정리하는 것으로 서서히 여생을 정리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하나, 60여년 전 경주 수학여행의 추억을 떠올리면서는 마치 10대 시절로 돌아간 듯 눈빛이 반짝거렸다.

소녀시절 역사소설을 쓰고 싶었다는 이 전 관장은 대학에서 사학을 공부하면서 고고학의 세계에 눈을 떴다. 대학 졸업 후 1957년 촉탁으로 덕수궁에 있던 국립박물관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땐 고고학을 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남들 안하니까 재미있을 것도 같았고, 박물관이 주로 발굴을 주도하기도 했고. 시골에서 방 한 칸 얻기도 어려운 시절이라 발굴장에 가면 구박을 많이 받았어요. 조그마한 방 하나 얻으면 남자들은 두세명씩 잘 수 있는데 난 여자 혼자니까…. 잘 데가 없으니까 주인집 아이들 자는 방에서 자기도 하고…. 나도 발굴장에 데려가달라고 애원하고 협박하고 다 했지. 10여년 가까이 따라다니면서 중요한 발굴도 했어. 지금도 화제가 되는 건 제천 청풍리 지석묘 발굴(1962년)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인골이 나왔는데, 내가 수습해서 ‘무덤 파는 여자’라는 별명이 붙었죠.”

여성차별이 만연하던 시대, 고고학 발굴현장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더구나 발굴장의 열악한 환경은 그로 하여금 유물 관리에 눈을 돌리게 했다. “당시 박물관장이던 김재원 관장께서 유물창고 열쇠를 줄 테니 창고에서 보물을 발굴해보라고 하시더군요.”

이 전 관장은 60년대 말 일본과 미국에서 박물관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국내 박물관 유물관리 체계의 기초를 수립했다. “업적을 이룬 게 없다”고 겸손해했지만 금속공예 등 연구가 미흡한 분야의 기초도 닦아놓았다. “박물관 창고를 지키다보니 연구가 안된 분야가 많이 보이더라고요. 그중에서 동경과 신라 토우를 갖고 조금씩 연구를 시작했는데, 워낙 남이 안한 걸 하다보니 주목을 받았지요.”

86년 여성 최초로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부임하면서 경주에 정착한 이래 경주를 떠난 적이 없다. 93년 퇴임한 이후 동아대 고고미술사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안에도 경주와 부산을 오갔다. 강의를 그만둔 2006년부터는 조용히 생활하고 있다.

“내가 공부하는 분야가 이쪽이다 보니 은퇴하고 나서 신라에 대해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었죠. 나홀로 경주에 사는 일이 외롭긴 하지만 나쁘지 않아요.”

그가 경주를 고집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문민정부 시절 갈 곳을 마련하지도 않은 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쓰이던 구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기로 한 데 강력히 반발한 그는 “문화재를 함부로 대하는 정부의 태도에 화가 나서” 서울에 잘 가지 않을뿐더러 어쩌다 가더라도 볼일만 보고 내려온다고 했다. “용서가 되지 않아” 2005년 서울 용산에 새로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에도 가보지 않았다고 했다. 지난해 박물관 100주년 기념 보관문화훈장 수여식 때도 박물관에 마련된 식장에만 갔을 뿐, 박물관 전시실은 둘러보지 않은 채 내려왔다.

“당시 느낀 절망감이 아직도 회복이 안 됩니다. 박물관을, 유물들을 갈 곳 없는 철거민 신세처럼 만들어 버렸잖아요.”

요즘의 박물관 운영에 대해서도 쓴소리가 터져나왔다. “박물관은 수집품을 잘 관리하고 소장 유물을 잘 보관해서 후대에 물려줘야 하는데 지금의 박물관들은 보급·전시와 교육에 너무 치중해서 걱정입니다. 유물들이 자꾸 전시장으로 나오면 손상될 우려가 커요. 이게 딜레마예요. 보관을 우선시하면 창고에 둬야 하고, 세상에 알리려면 유물 상태가 나빠질 수밖에 없으니…. 하지만 지금 전시가 너무 많아요. 학예사들이 유물에 대해 충분히 공부하고 깊은 의미를 부여한 다음 전시를 할 수 있도록 충분히 시간을 주면 좋겠어요.”

잊을 만하면 또다시 대두되는 문화재 환수에서부터 유물 관리까지,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눈이 아파 책을 멀리한다면서도 탁자 위에는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가 놓여 있었다. 그는 10년만 늦게 태어났다면 여성이라 차별받는 일도 덜 하고, 덜 싸워가면서, 더 좋은 환경에서 연구할 수 있었을 거라며 아쉬워했다. 천생 박물관과 결혼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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