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였을까 이 수많은 황금의 주인은
‘각종 황금 장신구와 귀금속, 그릇들로 가득찬 이 무덤의 주인은 누구일까?’
황금의 나라, 신라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황남대총(皇南大塚)’의 찬란한 유물들이 발굴 36년 만에 대거 공개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은 1973년부터 2년간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5만8441점의 유물 가운데 1268점을 엄선, 7일부터 전시하고 있다. 황남대총의 금관과 금장식 일부가 공개된 적은 있지만 신라 왕릉 하나만을 주제로 이처럼 대규모 전시를 열기는 처음이다.

‘황남대총 특별전’을 찾은 관람객이 7일 고분 출토 유물을 살펴보고 있다. |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왕과 왕비의 무덤이 서로 맞붙어 있는 쌍무덤이다. 덧널(목곽)을 3중 구조로 쌓아 공간을 확보한 뒤 그 바깥에 돌을 올려 단단히 다진 다음 흙으로 봉분을 쌓은 4세기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형태. 남북 길이 120m, 동서 지름 80m, 높이 22m로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함순섭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황남대총이 신라 마립간 시기에 축조된 왕릉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지만 아직 어느 마립간의 무덤인지는 학계에서도 논란 중”이라며 “무덤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고구려 고분 연구와 일본의 고훈시대 연구의 토대를 이루는 절대연대도 요동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큰 봉분이 생긴 것도 마립간 시기부터였다는 게 박물관 측의 설명이다.
마립간은 동북아시아에서 지배자 또는 족장의 일반 칭호인 ‘칸(干)’에 최고를 뜻하는 마립을 조합한 것으로 여러 칸 중 최고 지위인 왕을 지칭한다. 학계에서는 황남대총의 주인을 신라에서 처음 마립간이란 왕호를 쓴 17대 내물(재위 356~402년), 18대 실성(402~417년), 19대 눌지(417~458년)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시장은 황남대총의 구조를 쉽게 알 수 있도록 실물의 95% 규모로 재현해놓았다. 먼저 만들어진 게 남쪽의 왕의 무덤이고, 그로부터 약 20년 안팎의 세월이 지난 후 축조된 게 북쪽 왕비의 묘인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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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분에서 출토된 신라 왕비의 금관
전시장에 들어서면 먼저 만나게 되는 남쪽의 왕의 무덤엔 왕이 생전의 화려했던 모습으로 누워 있던 관이 가운데 놓여 있다. 관의 윗부분엔 왕이 가장 아꼈던 패물들과 갑옷, 금·은 그릇들이 들어 있다. 또 한쪽에는 젓갈류 등 음식과 관련된 것들이 들어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항아리들과 왕의 권위와 무력을 상징하는 수많은 창과 칼, 화살촉, 농기계류, 말 갑옷 등이 전시돼 있다. 일본과 중국 그리고 실크로드를 거쳐 들어온 물품도 다양하게 진열돼 있다. 특히 야광조개국자 등 다양한 일본물품의 출토는 신라가 일본열도와도 일정한 관계를 유지했음을 알려준다는 게 박물관 측의 설명이다.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나무 및 새의 이미지가 담긴 신라의 관이다. 그런데 금 허리띠와 화려한 큰칼을 찬 60대 남자로 추정되는 남쪽 무덤 속 주인은 마립간이 분명함에도 금동관을 쓰고 묻혔고, 이 마립간보다 늦게 죽어 북쪽 곁에 묻힌 그의 부인은 금관을 착용했다. 왜 황남대총에서 마립간이 금관이 아닌 금동관을 착용했는지는 미스터리이다. 남분과 북분의 관 모양을 통해 신라의 금관의 변천사도 살펴볼 수 있다. 금속제 머리띠에 세움 장식을 갖춘 이 관은 즉위식이나 신궁 제사를 지낼 때 썼던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다. 평상시 왕이 착용한 관은 고깔 형태였을 것으로 학계는 추정하고 있다. 고깔은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썩고, 귀금속으로 만든 관 꾸미개만 남아 있다. 이 외에도 전시장에는 순금과 은 등으로 만든 각종 장신구가 수두룩하다. 함 학예연구관은 “마립간 시기의 신라인들은 이승과 저승이 이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에 왕이 죽으면 생전에 누렸던 모든 것들을 무덤 속에 넣었으며, 살아 있는 왕은 죽은 왕의 무덤을 잘 만듦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과시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10월31일까지. 관람 무료. (02)2077-9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