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추석이 오면 고향을 찾았다. 살찐 가을볕을 쬐며 조상 무덤을 깎았다. 잘 다듬어진 무덤을 어루만지면 불효를 용서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상들과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옛정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추원보본(追遠報本), 이는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출세한 사람은 낮에, 삶이 곤궁한 사람은 밤에 내렸다. 그래도 고향의 달만은 모두에게 둥글었다.
올 추석에도 사람들은 고향을 찾을 것이다. 고향에는 가장 큰 달이 떠오르고, 그 속에는 눈물과 사랑의 다른 이름 어머니가 계실 것이다. 길들은 귀성객들이 점령할 것이다. 귀성의 기나긴 행렬은 어머니와 자식을 잇는, 고향과 객지를 잇는 흡사 탯줄 같은 인연의 끈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해마다 추석이 쪼그라들고 있다. 귀성객이 줄고 고향에 대한 생각들도 엷어지고 있다. 벌초를 이웃 또는 기관에 맡기고, 여행지에서 차례를 지내고, 심지어 ‘인터넷 성묘’를 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살아있으면, 목숨을 걸고 고향을 찾았던 일은 옛이야기가 되어가고 있다.
1974년 9월28일 용산역에서 ‘귀성객 압사사건’이 일어났다. 추석을 이틀 앞둔 용산역 광장은 귀성 인파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개찰이 시작되자 귀성객들이 물밀듯 밀려들어갔다. 표 검사는 할 수도 없었다. 모두들 구름다리 위로 올라가 밀고 밀렸다. 순식간에 사람과 사람이 엉켜 앞으로 나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비명을 더 큰 비명이 삼켰다. 계단에서 사람들이 쓰러져 밟혔다. 고향 열차를 타러가던 구름다리는 저승으로 가는 죽음의 다리가 되었다. 당시 언론은 4명이 사망하고 38명이 다쳤으며 ‘사상자는 거의 여공이나 가정부’라고 보도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이런 사실이 저 먼나라 얘기로 들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부모가 되어 있는,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추석은 명절 이상의 것이었다. 고향 가는 길이 힘들어도 그 속에 안기면 행복했다. 부모 품에서, 아니면 산소 앞에서 흘리는 눈물은 눈물 이상의 것이었다.
올해는 유독 한가위가 덜 익었다. 추석이 빨리 온 데다 태풍과 호우로 물가가 치솟았다. 또 수해를 입은 사람들은 아직도 젖은 가슴을 말리지 못하고 있다. 안팎의 소식들도 우울하기만 하다. 그래도 어렵지만 고향은 찾을 일이다. 엎드려 하늘과 땅과 조상에게 감사하는 것, 그것이 나를 찾는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