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택 |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작가는 종이의 피부에 섬세하고 날카로운 선, 단호한 선만을 그었다. 그 선은 무엇인가를 재현하거나 사물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림의 재료인 파스텔이라는 물질을 흩어지게 한다. 작고 단단한 파스텔을 쥐고 그것을 종이의 표면에 그어 가면서 이동한 순간 작가의 마음, 신경, 힘과 손의 온기 등을 전달해주며 스러진 것이다. 순간 선 하나가 짓는 무수한 표정과 볼륨, 정처 없는 떠돎이 감각적인 볼거리로 다가온다.

윤향란. 산책, 종이에 파스텔(학고재, 11.24-12.31)

윤향란. 산책, 종이에 파스텔(학고재, 11.24-12.31)

가늘고 짤막한 선들, 다소 두툼하고 굵은 선들이 흐르다가 멈춘 흔적이 응고되어 사각형의 화면을 메우고 있는 것이다. 그림은 이렇게 하나의 선만으로도 충족적이다. 그 선 하나를 어떻게 긋고 표현하느냐에 전 생애를 거는 일이 그림 그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선과 붓질만 봐도 그 작가가 어느 정도의 내공을 지니고 있는지 가늠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늘 그런 매혹적인 선 하나를 찾아다닌 것 같다. 추사의 선, 박수근의 우직한 연필선, 톰블리의 붓질, 박노수의 철사 같은 모필선 등이 떠오른다. 그런가하면 목기와 백자의 선도 떨림을 주는 선들이다. 윤향란의 목탄과 파스텔로 이루어진 선 역시 매혹적인 선이다. 무심히 그어댄 선, 목적도 욕망도 없이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북북 칠한 선이 절묘하다. 그 선으로 이루어진 것들은 형상도 아니고 낙서도 아니고 절박하고 원초적인 몸짓으로 착잡하다. 온전히 보여지지 않고 찢겨지고 흩어져 산란할 뿐이다. 그리는 동안의 몸의 놀림, 시간과 노동의 자취만 덩그러니 남은 그런 드로잉이다. 작가 개인의 예민한 감정의 떨림과 몸이 지닌 무수한 신경들의 진동, 심장의 박동, 가쁜 숨과 뜨거운 호흡으로 비벼져 있다.


Today`s HOT
미국의 어느 화창한 날 일상의 모습 마이애미 비치에서 선보인 아트 전시회 폭스바겐 노동자들의 파업 집회 베이징 스피드 스케이팅 우승 나라, 네덜란드 팀
크리스마스 모형과 불빛을 준비하는 도시의 풍경 할리우드 섹션에서 인도주의자 상을 수상한 마리오 로페스
훈련을 준비하는 프랑스 해군들 중국에서 홍콩으로 데뷔한 자이언트 판다 '안안'
프랑스-나이지리아 회담 루마니아 국회의원 선거 그리스를 휩쓴 폭풍 '보라' 추위도 잊게 만드는 풋볼 경기 팬들과 작업자들의 열정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