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종이의 피부에 섬세하고 날카로운 선, 단호한 선만을 그었다. 그 선은 무엇인가를 재현하거나 사물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림의 재료인 파스텔이라는 물질을 흩어지게 한다. 작고 단단한 파스텔을 쥐고 그것을 종이의 표면에 그어 가면서 이동한 순간 작가의 마음, 신경, 힘과 손의 온기 등을 전달해주며 스러진 것이다. 순간 선 하나가 짓는 무수한 표정과 볼륨, 정처 없는 떠돎이 감각적인 볼거리로 다가온다.
가늘고 짤막한 선들, 다소 두툼하고 굵은 선들이 흐르다가 멈춘 흔적이 응고되어 사각형의 화면을 메우고 있는 것이다. 그림은 이렇게 하나의 선만으로도 충족적이다. 그 선 하나를 어떻게 긋고 표현하느냐에 전 생애를 거는 일이 그림 그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선과 붓질만 봐도 그 작가가 어느 정도의 내공을 지니고 있는지 가늠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는 늘 그런 매혹적인 선 하나를 찾아다닌 것 같다. 추사의 선, 박수근의 우직한 연필선, 톰블리의 붓질, 박노수의 철사 같은 모필선 등이 떠오른다. 그런가하면 목기와 백자의 선도 떨림을 주는 선들이다. 윤향란의 목탄과 파스텔로 이루어진 선 역시 매혹적인 선이다. 무심히 그어댄 선, 목적도 욕망도 없이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북북 칠한 선이 절묘하다. 그 선으로 이루어진 것들은 형상도 아니고 낙서도 아니고 절박하고 원초적인 몸짓으로 착잡하다. 온전히 보여지지 않고 찢겨지고 흩어져 산란할 뿐이다. 그리는 동안의 몸의 놀림, 시간과 노동의 자취만 덩그러니 남은 그런 드로잉이다. 작가 개인의 예민한 감정의 떨림과 몸이 지닌 무수한 신경들의 진동, 심장의 박동, 가쁜 숨과 뜨거운 호흡으로 비벼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