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지미씨와 데뷔 동기
‘국민배우’ 안성기(59). 안성기는 이름과 직업 앞에 ‘국민’이란 칭호를 받은 최초의 주인공이다. 1995년 영화전문지 ‘씨네21’에서 그를 ‘국민배우’로 칭한 걸 계기로 신문·방송 등 언론과 영화팬들이 인정하면서 누구나 공감하는 ‘국민배우’가 됐다.
안성기는 두 번의 데뷔를 했다. 아역배우와 성인배우. 데뷔와 재데뷔(컴백), 두 경우 모두 그의 아버지(안화영)가 자리해 있다. 데뷔작과 컴백 성공작 모두 대타로 기용됐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아역 데뷔는 1957년, 다섯 살 때 했다. 데뷔작은 <황혼열차>(감독 김기영).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유학을 떠나려는 여인(도금봉)의 사생아, 고아원에서 자라는 꼬마 ‘영수’로 출연했다.
안성기의 어린시절.
당시에는 아역 전문 배우가 없었다. 고(故) 김기영 감독은 캐스팅한 아역의 연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실제 고아를 데려다 써도 마찬가지. 어느 날 김기영 감독은 <황혼열차> 기획자인 안화영씨에게 똘똘하다는 아들을 데려와 보라고 했다. 이 아들이 바로 3형제 중 둘째인 안성기.
안성기는 핀치 히터 역할을 보란듯이 해냈다. 단 우는 연기가 좀 모자라자 김기영 감독은 안성기의 손바닥을 때려 울린 뒤 촬영을 마쳤다. 누가 알았으랴, 이 꼬마가 30여년 뒤 ‘국민배우’가 될 거라고.
<황혼열차>는 김지미(70)씨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그녀는 고아원 설립자(최삼)의 딸 역을 맡았다. 이 영화에는 안화영씨도 출연했다. 김지미씨의 오빠로.
김지미씨는 김기영 감독이 발탁했다. 김지미씨 언니가 하는 다방에서 발견, <유정>에 기용하려고 했다. <유정> 연출이 무산되면서 <황혼열차>로 데뷔시켰다. 언니가 다방을 하지 않았다면, 그 다방에 김기영 감독이 가지 않았다면, 김지미씨가 김기영 감독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한국영화사를 화려하게 장식한 배우 김지미씨는 존재하지 않았을는지 모를 일이다.
김기영 감독과 안화영씨는 서울대학교 재학생 때 함께 연극반 활동을 했다. 김기영 감독은 의대, 안화영씨는 문리대를 다녔다. 김기영 감독은 세 번째 연출작 <봉선화>(1956)에 안화영씨를 주인공으로 기용했다. <봉선화>가 흥행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안화영씨는 계속 배우로도 활동했을까? 그랬다면 부자(父子)가 함께 출연한 영화가 몇 편이라도 공개됐고, 이 가운데 뜨거운 화제를 낳은 작품도 있지 않았을까?
1959년 제4회 샌프란시스코영화제에서 소년특별연기상을 받는 등 ‘아역스타’로 이름을 날리던 안성기는 1965년 중3때 <얄개전>을 마지막으로 은막을 떠났다. 영화연구가 정종화씨에 따르면 아역 출연작은 70여 편이다.
영화 ‘만다라’ (1981년)
# 성공의 씨앗, 백수의 눈물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했다. ‘국민배우’ 안성기도 성인 배우로 거듭나는 과정에 성공의 밑거름인 눈물의 씨앗을 숱하게 뿌렸다.
1976년 ROTC 출신 장교로 제대한 안성기는 전공(외국어대 베트남어과)을 살려 대기업을 노크했다. 공산화된 베트남과 국교가 단절돼 번번히 분루를 삼켰다. 동기들과 달리. 종전(終戰)으로 참전하지 못할 때부터 꼬이기 시작한 꿈이 제대한 이후까지 이어진 것이다.
안성기는 진로를 변경했다. 군대에서 적금을 부어 모은 돈 60만원으로 중앙대 대학원 연극영화과에 입학, 영화이론을 공부했다. 하지만 학부에서 영화를 전공한 동기들을 따라가는 게 벅찼다. 결국 한 학기만에 그만두고 진로를 수정했다. 다시 배우가 되자고. 어머니는 “아무나 하는 게 아냐”라며 펄쩍 뛰셨고, 아버지는 “힘들 거야, 그런데 고생을 많이 하면 할수록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다”면서 찬성하셨다.
아니나 다를까 배우가 되는 건 쉽지 않았다. 아역스타로서의 명성은 과거사에 불과했다. 안성기는 백수생활 철칙을 세우고 이에 따라 생활했다. 아침에는 체력을 기르기 위해 새로 구입한 자전거를 탔다. 몸매를 만들기 위해 보디빌딩도 했다. 스파르타식 강의로 유명한 한 영어학원에 다니면서 1주일에 두세번은 프랑스문화원을 찾아 영화의 세계를 만끽했다. 밤에는 두문불출한 채 시나리오 작업에 몰두했다. <누마>(누나와 엄마의 이미지를 혼합한 말), <흑점> 등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 세 편을 완성했다. 이렇게 2년을 보낼 때 본인은 물론 부모님들은 얼마나 가슴이 탔을는지 눈에 선하다.
# “아역 출신은 어려워”
성인 데뷔는, 컴백은 1977년에 <병사와 아가씨들>(감독 김기)로 했다. 이어 1978년 <제3공작>(감독 설태호), 1979년 <야시>(감독 박남수)와 <우요일>(감독 박남수)에서도 조연을 맡았다. 이 가운데 <병사와 아가씨들>과 <제3공작>은 세경흥업에서 제작한 작품으로 안화영씨는 이 영화사의 상무였다.
<병사와 아가씨들>은 경비초소 군인들과 고속버스 안내양을 주인공으로 한 멜로드라마다. 안성기는 성격이 밝은 병사 역을 맡아 이동진·이영옥·김경애 등과 호흡을 맞췄다. <제3공작>은 6·25를 다룬 전쟁영화다. 안성기는 특공대 막내로 출연, 황해·이대엽·장혁 등과 함께했다.
<야시>(夜市)와 <우요일>(雨曜日)은 한 여성이 치르는 사랑의 행로를 그렸다. <야시>는 장미희·김추련·윤일봉, <우요일>은 정윤희·윤일봉·전양자 등이 주요 배역을 맡았다.
영화 ‘우요일’ 의 촬영현장(1979년).
안성기는 <야시>에선 아이스하키 선수 ‘석호’, <우요일>에서는 수영 선수 ‘덕신’으로 출연했다. ‘석호’는 순결을 잃고 방황하던 ‘승아’와 진실한 사랑을 나누지만 시합 중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덕신’은 음대에 다니는 여자친구 ‘수자’가 제주도에서 만난 중년남자와 가까이 지내자 절교를 선언한다.
안성기는 네 편에서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의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에 따르면 컴백작 <병사와 아가씨들>은 아예 상영기록이 없다. 극장에 간판도 내걸지 못한 채 창고로 직행한 것이다. <야시>는 1979년 2월 23일 단성사에서 개봉, 10만1083명이 관람했다. 1979년 4월 19일부터 신도극장(대전)에서 상영된 <제3공작>은 고작 2,100명이 관람하는 데 그쳤다. <우요일>은 1980년 4월 17일 단성사에서 개봉돼 2만4497명이 관람했다.
안성기는 ‘아역배우는 성인배우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통설을 실감해야 했다. 한 가닥 남은 배우의 길도 자신의 몫이 아니라는 걸 절감, 방에 혼자 있을 때면 눈물을 줄줄 쏟고는 했다. 영화를 하기 전에 막막했던 시절이, 보랏빛 꿈을 꾸던 시절이 오히려 행복했다. 어린시절의 뜨거웠던 박수갈채는 고사하고 배우로 인정해주는 눈길과 손길이 그리웠다. 부글부글 끓다 못해 시커멓게 타버린 가슴을 다독이며 촬영장을 쫓아다녔다.
# “그것도 제대로 못하냐?”
포기하지 않으면 성공의 길은 열린다. 언젠가는 기회가 온다. 열심히 촬영장을 찾아 눈도장을 찍던 안성기에게도 기회의 문이 열렸다. 다시 배우의 문을 두드린 지 4년 만에 구원의 천사를 만나면서.
구원의 천사는 배창호 감독. 그는 아역 시절 팬이었다면서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의 중국집 배달부 ‘덕배’ 역에 안성기를 추천했다. 그는 당시 <바람불어 좋은 날>의 조감독이었다. 훗날 <철인들>(1982)부터 <흑수선>(2001)까지 12편을 안성기와 함께했다. <철인들> <꼬방동네 사람들> <적도의 꽃>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기쁜 우리 젊은 날> 등을 연출, 안성기와 함께 1980년대 한국영화계를 이끌었다.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 (1980년)
<바람불어 좋은 날>은 고도성장에 따른 사회적 모순을 그린 블랙코미디 수작이다. ‘덕배’는 약간 사팔뜨기인 한 배우가 맡았는데 연기력이 떨어져 이 감독은 새 인물을 찾았다. 유명 코미디언 고모씨, 성우 배모씨 등이 물망에 올랐다.
안성기는 제외됐다. 사시에 말더듬이인 ‘덕배’ 역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가슴이 뜨거워진 안성기는 이 감독을 쫓아다니며 간청을 했다. 이 과정에 백수시절에 쓴 시나리오도 내밀었다. 이 가운데 윤흥인씨 소설 <기억속의 들꽃>과 천승세씨 단편 <눈꽃>을 혼합해 써놓은 작품이 이 감독에게 인정을 받으면서 ‘덕배’ 역에 발탁됐다. 안성기는 “감독님이 ‘너, 감각있구나’ 하셨을 때 그간의 설움이 단번에 사라지는 걸 느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세상을 거머쥔 듯한 기쁨도 잠시 안성기는 고행 길을 걸어야 했다. 여간 깐깐하지 않은 데에다 성격이 괄괄한 이 감독이 “그것도 하나 제대로 못 하냐”면서 퍼붓는 독설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철가방을 든 채로 스태프 몰래 눈물을 훔치고는 했다. “잘할 때까지 계속해”라는 말에 배달을 마치고 돌아오는 장면의 경우 발이 부르트도록 온 종일 같은 길을 오르락내리락 해야 했다.
안성기는 자괴감에 잠을 못 이루고는 했다. ‘배우가 연기를 못한다, 더구나 아역스타로 이름을 날렸던 배우가…. 이렇게 창피할 수가….’ 절로 눈물이 나왔다. 눈물을 훔치면서 촬영한 장면의 복기를 하고, 촬영할 장면의 수읽기를 했다. 당시 안성기와 한 방을 쓰던 배창호 감독은 “흐느끼는 소리에 깨보니 안성기씨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있더라”면서 “될성부른 떡잎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안성기는 이렇게 본인의 노력과 주변의 독려에 담금질을 거듭, 마침내 극중의 ‘덕배’가 됐다. <바람불어 좋은 날>이 흥행성과 작품성을 인정받는 것과 더불어 안성기도 주목받았다.
<바람불어 좋은 날>은 1980년 11월 27일 명보극장에서 개봉, 10만228명이 관람했다. <느미> <미워도 다시 한번 ’80> <평양맨발> 등에 이어 이 해 흥행 4위를 차지했다. 안성기 제19회 대종상영화제에서 남자신인상을 수상,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이어 1981년 <만다라>(감독 임권택)에서 ‘법운’ 스님으로 열연, 제18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연기상을 차지했다. 제32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을 장식한 <만다라>를 필두로 해외에서도 손꼽는 배우가 됐다. 30여 년 간 이렇다 할 굴곡 없이 늘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국민배우’로 각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