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제보의 상징’ 이지문씨 정치학 박사 학위
14대 국회의원 선거를 이틀 앞둔 1992년 3월22일 서울 종로구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사무실. 육군 9사단 28연대 소속이던 이지문 중위가 기자회견문을 읽어 내려갔다. 그는 군대 내 투표에서 심한 부정행위가 이뤄지고 있다며 군 부재자투표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한 시간여에 걸친 기자회견이 끝나고 그는 곧바로 연행돼 영창에 수감됐다. 군은 이 중위를 이등병으로 불명예 제대시켰다.
‘공익제보의 상징’ 이지문씨(43)가 26일 연세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게 됐다. 논문 주제는 ‘한국 민주주의의 질적 고양을 위한 추첨제 도입 방안 연구’다.
이씨는 논문에서 한국 민주주의 위기의 본질로 대표성의 부재를 꼽았다. 그는 국회를 양원제로 구성한다는 것을 전제로 상원은 선거를 통해, 하원은 성과 나이, 지역, 소득수준 등을 고려해 추첨을 통해 뽑는 방안을 해결책으로 제시했다. 그렇게 하면 다양한 사회 계층을 반영해 대표성을 확보하고, 많은 시민들이 정치에 직접 참여할 수 있다는 게 이씨의 설명이다.

그는 “추첨제가 다소 낯설겠지만 고대 아테네의 사례와 각국 법원의 배심원제에서 성공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과거 독재 시대에는 선거의 공정성이 중요했지만 어느 정도 민주화가 이뤄진 상황에서 진정한 대표를 선출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공천을 두 차례 신청해 보고 서울시의원까지 지낸 이씨는 대표자 선출이 특정 인물에게 국한돼 있다는 것을 몸소 느꼈다고 한다.
이씨의 이번 논문은 19년 전 양심선언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씨는 “잘못된 투표로 엉뚱한 사람이 대표가 된다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당시 양심선언의 이유를 밝혔다.
이씨의 상사인 중대장의 의로운 태도도 양심선언을 결정하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씨는 “당시 대부분의 중대장들은 투표 결과가 인사고과에 반영되기 때문에 부정투표를 지시하거나 눈감았다”면서 “그러나 내가 모시던 중대장은 이런 폐단을 고쳐야 한다며 눈물까지 보였다”고 말했다.
이씨는 현재 공익제보자와함께하는모임의 부대표다. 반부패 내부 고발 운동을 계속하며 논문 내용을 하나의 사회운동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그는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주민참여예산제에 참가할 주민을 공모하고 있는데, 이것을 추첨으로 바꾸는 등 작은 단위에서부터 제안을 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씨는 내부 고발자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법적으로 내부 고발자를 보호할 수 있는 장치는 마련돼 있지만 이들을 ‘배신자’로 보는 인식은 아직도 팽배하다”면서 “잘못된 것을 알리는 게 민주 시민의 자세라는 문화가 조성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